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109

갈 사람 가느라 가을입니다만-이원규-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9) 갈 사람 가느라 가을입니다만 이원규(1962~ ) 봄은 환하게 다 보여 봄입니다만 그대 얼굴이 잘 안 보이니 여름은 열나게 생각만 열어 여름이고요 가을은 갈 사람 가느라 가을입니다만 코로나 19 희망도 없이 KF 마스크로 서로의 얼굴을 가리니 포옹도 입맞춤도 없이 마침내 복에 겨운 날들이 가고 지구촌의 사계는 힘겹고 지겨운 겨울 복면의 겨울은 겹고 겨워 겨우내 겨울이니 아무 반성도 없이 여전히 그대는 나의 백신입니다만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9번째 시는 이원규 시인의 “갈 사람 가느라 가을입니다만”입니다. 아침에 아내와 출근하고자 손잡고 아파트 문을 나섰는데 가을 하늘과 햇살이 그야말로 황홀경입니다. 찬란한 가을 햇살 아래 꽃들은 아름다운 모습을..

안부-전영관-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8) 안부 전영관(1961~ ) 멀리서 보면 울음과 웃음이 비슷하게 보인다 타인은 관심 없고 제 것만 강요하는 우리끼리 잡담한다 겸손한 척 거리를 두는 습관을 우아한 외면 혹은 비겁이라 조롱했다 우리들 하루란 칭병(稱病)하고 누운 사람을 문병 가는 일 잡아당겨보면 내부가 자명해지는 서랍처럼 거짓말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 돌아서 안녕이라 손 흔들어도 우는지 웃는지 몰라서 편안한 거리를 그대들과 유지하고 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8번째 시는 전영관 시인의 “안부”입니다. 햇볕이 무던히 쏟아지는 창가를 무심히 바라보는 오후였습니다. 더위가 세상의 소음을 죄다 삼켜버린 듯 나뭇가지들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는 오후였습니다. 적막을 깨고 핸드폰이 울립니다. ..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안상학-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7)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안상학(1962~ )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 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 때 그곳에서 뿌리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애인처럼 순두부-고은진주-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6) 애인처럼 순두부 고은진주(1967~ ) 몽글몽글 뭉쳐지기는 하겠지만 굳어지지 않겠다, 는 확고한 내용이다 간수하겠다는 뜻이다 순순한 콩물에 밀물 들듯 뭉쳐지는 모양 이제야 간을 만났다는 환호성이다 보드라운 한 입맛이 되었다는 선언이다 말랑하면서도 울렁거리는 풍랑이 건네준 믿지 못할 수심이다, 순두부 한 숟가락 양념장 얹어 푹 퍼먹으면 울돌목 소용돌이와 달의 재잘거림 머리 끄덕이며 알 수 있다 조목조목 씹으면 저 먼 빙하 맛이 난다 굳이 숟가락 필요 없이 훌훌 들이마셔도 아무런 뒤탈 없는 두부들 세계에서 순하디순한 애인 같아 보여도 모 안에 엉키거나 엉기지 않으려는 순두부, 연한 꿍꿍이가 말캉말캉 살갑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6번째 시는 고은진주..

자작나무 인생-나석중-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5) 자작나무 인생 나석중(1938~ ) 흰 허물을 벗는 것은 전생이 뱀이었기 때문이다 배때기로 흙을 기는 고통보다 붙박이로 서 있는 고통이 더 크리라 눈은 있어도 보지 않는다 입은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 속죄를 해도 죄는 남고 허물 벗는 참회의 일생을 누가 알리 몸에 불 들어올 때나 비로소 자작자작 소리를 내는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5번째 시는 나석중 시인의 “자작나무 인생”입니다. 숲은 우리에게 항상 경외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숲길을 걷는다는 건 새로운 세상을 맞는 일이기도 합니다. 숲에는 우리 마음을 정화하는 모든 것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시인은 숲길을 걸으며 자작나무를 봅니다. 많은 나무들 중에 왜 하필 자작나무가 보였을까요? “자작자작 소리를..

호박잎쌈-이건행-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4) 호박잎쌈 이건행(1965~ ) 술 취하면 부여사람이라고 울먹이며 말했던 아버지 까닭을 몰랐으나 생전에 즐겨 드신 호박잎쌈 먹으니 알 것 같네 호박잎에 눌어붙어 하늘거린 아버지 세상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4번째 시는 이건행 시인의 “호박잎쌈”입니다.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보리밥에 물을 말아 고추장에 고추를 잔뜩 찍어 맛있게 드셨던 장면은 시골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생각나는 추억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아버지 입속에서 나는 고추 씹는 소리는 세상 어느 소리보다 청아하고 맑았습니다. 호박잎이 연한 색을 띄기 시작할 때 살짝 데쳐서 된장에 얹어먹는 밥맛은 아무나 느낄 수 있는 맛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식들..

중학교 선생-권혁소-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3) 중학교 선생 권혁소(1962~ ) 백창우의 동요‘내 자지’를 너무 무겁게 가르쳤다고 학부모들에게 고발당했다 늙어서까지 젖을 빠는 건 사내들이 유일하다고 떠도는 진실을 우습게 희롱했다가 여교사들에게 고발당했다 아파트 계단에서 담배 피고 오줌 쌌다는 주민 신고 받고 홧김에 장구채 휘둘렀다가 애한테 고발당했다 자지는 성기로 고쳐 부르겠다 젖 같은 얘긴 하지 않겠지만 만약 하게 될 일이 있다면 사람이나 포유동물에게서 분비되는, 새끼의 먹이가 되는 뿌연 빛깔의 액체로 고쳐 말하겠다 그리고 애들 문제는 경찰에 직접 맡기겠다 잘 있어라 나는 간다 수목한계선에 있는 학교여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3번째 시는 권혁소 시인의 “중학교 선생”입니다. 필자가 어릴 적..

은하미장원-신은숙-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2) 은하미장원 신은숙(1970~ ) 눈 내린 사북 거리 미용사는 일찍이 은하로 떠났는지 흰 슬레이트 검은 페인트 간판 하나 허공을 붙잡고 있다 사북 거리는 온통 간판만 운행 중이다 시몬이발소도 시몬이 떠난 지 오래다 빠마 고데 신부화장 벗겨진 선팅지 너머 꼬불거리고 빛나는 머릿결 쓸어 올린 눈 같은 신부가 앉아 있다 푸른 눈두덩 새빨간 입술 안개꽃 드레스 입고 웃고 있다 신부는 아직 사북에 남았을까 탄가루 날리는 봄 멀리 우는 함백역 기적 따라 떠났을까 미용실도 헤어숍도 아닌 미장원 가위 소리 사라졌어도 검고 흰 기억들만 교차하는 사북 거리 나도 한때 푸른 은하였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2번째 시는 신은숙 시인의 “은하미장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아버지의 방천-하병연-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1) 아버지의 방천 하병연(1969~ ) 진골 골짝 논에 방천이 나서 아버지 방천 쌓는다 진주성 성벽 같은 방천 큰 돌 앉히면 작은 돌로 둥근 돌 앉히면 모난 돌로 납작 돌 앉히면 강돌로 생김생김 모두 다른 돌이지만 공구고 찡구고 박아넣고 채우고 쓸모없는 돌 하나 없이 모두 모두 한 몸 되어 완성된 아버지의 방천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1번째 시는 하병연 시인의 “아버지의 방천”입니다. 3대 미성(美聲)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글 읽는 소리, 바둑 두는 소리, 우리 집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가 그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어릴 적 농촌의 일과는 바쁘기만 하였습니다. 그때는 비가 많이 와도 걱정,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 들어도 걱정..

밤 열차-이철경-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0) 밤 열차 이철경(1966~ ) 늦은 시간 남루한 사내가 노약자석에서 졸고 있다 내릴 곳을 잃었는지 이따금씩 초점 잃은 눈빛으로 부평초 마냥 공간을 흐른다 저 중년의 사내, 삼십 분 전 의자 난간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어깨를 보았다 저 꺾인 날개의 들썩임 전철도 부르르 떨면서 목 놓아 우는구나 중년의 무게에 짓눌린 밤 열차조차도 흐느끼며 뉘엿뉘엿 남태령 넘는구나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0번째 시는 이철경 시인의 “밤 열차”입니다. 코로나19라는, 여지 것 우리 사회가 겪어보지 못했던 질병으로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입니다. 1997년에 시작된 IMF시대보다 더한 고통을 우리들은 겪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피해는 소상공인이나 소규모 자영업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