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109

열매론-이향란-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9) 열매론 이향란(1962~ ) 익었다는 것은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꽃의 시간을 지나 하나의 열매가 영글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땅을 향해 툭, 온몸을 던질 때 열매는 이미 두려움을 잊을 만큼 연약한 가지에 매달린 생에 익숙해진 것이다 모진 바람과 따가운 햇볕과 온갖 벌레로부터 산책을 하다가 이름 모를 나무에 빼곡히 매달린 작은 열매를 본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빨갛게 열매로 타오르는 것들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모으거나 새나 벌레의 먹이가 되거나 이도저도 아닌 시간 속에 머물다 떨어질지라도 열매는 두려움이 없다 이름 없는 나무의 열매로 맺히기까지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낙과로 마지막을 장식할지라도 미련이나 두려움 없이 뛰어내릴 수 있었던..

슬픔을 사랑하겠다-이정하-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8) 슬픔을 사랑하겠다 이정하(1962~ ) 저녁을 사랑하겠다. 해질녘 강가에 드리우는 노을을 사랑하겠다. 노을 속에 물결이 아름답게 일렁이는 것을 사랑하겠다.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 아니면 내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들이 속절없이 저 노을의 세계로 흘러 들어가는 강가를 사랑하겠다. 나는 그렇게 저녁마다 수없이 그대를 떠나보내는 연습을 한다. 내 속에 있는 그대를 지우는, 혹은 그대 속에 있는 나를 지우는, 그 안타까운 슬픔을 사랑하겠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8번째 시는 이정하 시인의 “슬픔을 사랑하겠다”입니다. 사랑을 하셨나요? 이별을 해보았나요? 그렇다면 슬픔은 어떻게 잘 견디셨나요? 사랑과 이별은 마치 쌍둥이 같습니다. 사랑=이별, 이는 예나 지..

버섯-문성해-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7) 버섯 문성해(1963~ ) 장마 지나간 뒤 땅이 하늘에게 거는 말풍선 그 길고 촘촘한 낙하를 땅이 받았다는 영수증 묽고 비린 비의 현신 누군가 허리를 굽혀 보게 하는 카운트다운 전의 로켓 오래 끄는 장마의 뒤끝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7번째 시는 문성해 시인의 “버섯”입니다. 올 여름엔 참으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장마 중간 중간에 산행을 했었는데,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등산객보다도 더 많은 버섯을 보았습니다. 버섯은 산길 죽은 나무 밑을 중심으로 도처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등산로에 서 있는 나무 말뚝에도 여지없이 버섯이 버젓이 피어 있어 놀란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처럼 많은 버섯이 있다는 생각을 예전엔 못했었습니다. 버섯..

알밤 한 알-전인식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6) 알밤 한 알 전인식(1964~ ) 화두話頭 하나 품으면 한 세상이 잠깐이지 높고 외로운 가지 끝 움막 하나 짓고 무릇 잡것들 범접하지 못하게 촘촘히 가시울타리로 둘러친 다음 한 올 바람도 들지 못하게 문 닫아걸고 눈 감고 앉으면 오로지 한 생각에 바람이 불었는지 비가 왔는지 하안거夏安居도 끝나갈 때쯤 톡 톡 깨달음이 터지는 소리 감았다 뜨는 눈에 비로소 들어 안기는 삼라만상 환한 세상 여쭤볼 틈도 없이 산비탈 숲 속으로 홀연히 입적入寂하고 마는 알밤 한 알 좋겠다 숲 속 다람쥐는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6번째 시는 전인식 시인의 “알밤 한 알”입니다. 지루한 장마 끝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간 이 무더위도 자취를 감추고 사..

용불용설-한상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5) 용불용설用不用說 한상호(1956~ ) 자꾸 가늘어지는 그리운 힘줄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5번째 시는 한상호 시인의 “용불용설”입니다. 옛적에 쓴 잡기장을 들여다본 적 있나요? 사소한 친구와의 말다툼 때문에 하얗게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빨갛게 또는 노랗게 알록달록 물든 단풍을 보며 시상(詩想)에 잠겼던 그때 그 추억이 아롱아롱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이른 봄에 피는 꽃을 보며 왜 그렇게 마음 설렜던 것일까요. 소나기는 멀리 있는 친구를 소환하기도 했습니다. 겨울날 하늘을 흐드러지게 수놓았던 눈송이는 미래를 향한 편지지이기도 했지요. 작은 일에도 깔깔깔 거리고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해했던 하얀 백지 같던 마음은 세월과 함께 영원한 추억거리로만 남..

그대에게 가는 저녁-권지영-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4) 그대에게 가는 저녁 권지영(1974~ ) 어떤 말은 너무 깊어 꺼낼 수 없어요 어떤 말은 너무 얕아 꺼낼 수 없어요 어떤 말로도 그대를 대신 할 수 없어요 내가 유일하게 돌아갈 그대라는 단 하나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4번째 시는 권지영 시인의 “그대에게 가는 저녁”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말을 합니다. 그 말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때론 독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세상이 소음으로 뒤덮인 요즘 말도 또 하나의 공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표현하고자 할 때 시의적절한 말을 찾는 것은 가난한 집 밥상에서 고기를 찾는 것만큼 요원할 뿐입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내 마음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

바닥에 대하여-오성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3) 바닥에 대하여 오성인(1987~ ) 할당된 몫을 비우고도 밥그릇 핥는 데 여념이 없는 개, 바닥 깊숙이 스민 밥맛 하나라도 놓칠세라 잔뜩 낮춘 몸 지금 그의 중심은 바닥이다 온몸의 감각을 한군데로 끌어모으는 나차웁고 견고한 힘 모든 존재들은 낮은 데서 발원하나 생이 맨 처음 눈뜨고 마지막 숨들이 눕는 계절이 첫발을 내디뎠다가 서서히 발을 거두어들이는 최초이며 최후인 최선이거나 최악인 더는 낮아질 일도 붕괴될 일도 없는 낮은 벽, 혹은 천장 낮춘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무게를 동시에 겪어 내는 일, 혼신을 다해 희로애락애오욕을 지탱해 내는 일 그러므로, 나는 낮을 것이다 개의 혀가 밥그릇 너머의 피땀까지 닦아 내듯, 이생과 그 너머의 생까지 두루 읽어 낼 일이다 기..

코뚜레-신휘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2) 코뚜레 신휘(1970~ ) 한 일 년 쇠죽을 잘 끓여 먹이고 나면 아버지는 송아지의 콧살을 뚫어 코뚜레를 꿰었다. 대나무나 대추나무를 깎아 어린 소의 콧구멍에 구멍을 낸 뒤 미리 준비해둔 노간주나무로 바꿔 꿰는 작업이었다. 코뚜레는 단단했고, 어린 소의 코에선 며칠씩이나 선홍빛 피가 흘러내렸다. 소는 이내 아픈 코에 굳은살이 박였는지 오래지 않아 한결 유순하고 의젓한 소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놈을 몇 달 더 키운 뒤 일소로 밭에 나가 부리거나 제값을 받고 먼 시장에 내어다 파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사납고 무서웠던지, 오십이 다 된 나는 지금까지 코뚜레를 꿰지 못한 어린 소로 살고 있다. 누가 밖에 데려다 일을 시켜도 큰일을 할 자신이 없었거니..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왕은범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1)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왕은범(1959~ ) 가만 하늘을 보면 별처럼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 앞에 앉으면 다정스레 쌈을 싸서 바알간 입에 넣어주고 싶은 사람 안개 자욱한 호숫가 카페에 앉아 그윽한 눈 이야기 나눌 그런 사람 눈이 하얗게 하얗게 벚꽃처럼 내리기 시작했을 때 전화기를 꺼내 “눈이 와”라고 속삭이고 싶은 사람 오래 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순백의 구절초 같은 사람 볕 좋은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구름처럼 몽글몽글 그려지는 사람 나는 진정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보랏빛 그리움 같은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1번째 시는 왕은범 시인의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입니다. 의미 있게 삶을 사..

사과없어요-김이듬-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0) 사과없어요 김이듬(1969~ ) ​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어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 달라고 할까, 아 어쩐다, 그러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선짜장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쫓겨날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 커녕 몽땅 뒤집어쓴 적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제거되고 추방된 나로서는, 아아 어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