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즐거움 4

열매론-이향란-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9) 열매론 이향란(1962~ ) 익었다는 것은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꽃의 시간을 지나 하나의 열매가 영글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땅을 향해 툭, 온몸을 던질 때 열매는 이미 두려움을 잊을 만큼 연약한 가지에 매달린 생에 익숙해진 것이다 모진 바람과 따가운 햇볕과 온갖 벌레로부터 산책을 하다가 이름 모를 나무에 빼곡히 매달린 작은 열매를 본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빨갛게 열매로 타오르는 것들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모으거나 새나 벌레의 먹이가 되거나 이도저도 아닌 시간 속에 머물다 떨어질지라도 열매는 두려움이 없다 이름 없는 나무의 열매로 맺히기까지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낙과로 마지막을 장식할지라도 미련이나 두려움 없이 뛰어내릴 수 있었던..

그대에게 가는 저녁-권지영-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4) 그대에게 가는 저녁 권지영(1974~ ) 어떤 말은 너무 깊어 꺼낼 수 없어요 어떤 말은 너무 얕아 꺼낼 수 없어요 어떤 말로도 그대를 대신 할 수 없어요 내가 유일하게 돌아갈 그대라는 단 하나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4번째 시는 권지영 시인의 “그대에게 가는 저녁”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말을 합니다. 그 말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때론 독이 되어 되돌아옵니다. 세상이 소음으로 뒤덮인 요즘 말도 또 하나의 공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표현하고자 할 때 시의적절한 말을 찾는 것은 가난한 집 밥상에서 고기를 찾는 것만큼 요원할 뿐입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내 마음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

시든 꽃-신단향-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78) 시든 꽃 신단향 ​ 엊그제, 생일날 배달온 꽃이 시든다. 꽃잎 사이사이 링거처럼 물방울 대롱거리는데 길 떠나려 서두르는 중이다. 활짝 핀 웃음 흘려주지 않고 꽃봉오리 얼굴 꽉 굳은 채, 잎 옹그리고 고개 숙인 채, 낯선 길목이 두려워 옹그려지는 듯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78번째 시는 신단향 시인의 “시든 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웃음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 어린아이와 꽃을 선물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꽃은 그만큼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입니다. 어린아이는 마음대로 취할 수 없지만 꽃은 마음먹기에 따라 가꿀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활짝 핀 꽃을 본다는 것은 마음이 밝아지고 환해진다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꽃은 칭송의 대상이었습..

혼수를 뜯다-서양숙-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77) 혼수를 뜯다 서양숙(1957~ ) ​ 외출했다 일찍 들어온 날, 당신은 뜯어보았던 내 이불 홑청을 다시 꿰매고 있었지요 혼수 이불 속 솜을 확인하고 있었지요 목화가 라일락이 되어 있을까 봐요? 목화가 목련이 되었을까 봐요? 목화입니다 목화솜입니다 아니, 내 엄마가 밤새 바스러 넣은 하얀 찔레꽃입니다 핏빛 숨긴 찔레꽃입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77번째 시는 서양숙 시인의 “혼수를 뜯다”입니다. 결혼은 한 개인과 개인이 만나 하나의 집안을 세우는 일입니다. 가풍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 상호 조화 융합을 이루면서 새로운 가풍을 가진 집안을 만드는 일이지요. 결혼은 그래서1+1=2가 아니라 1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통계적으로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