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9) 열매론 이향란(1962~ ) 익었다는 것은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꽃의 시간을 지나 하나의 열매가 영글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땅을 향해 툭, 온몸을 던질 때 열매는 이미 두려움을 잊을 만큼 연약한 가지에 매달린 생에 익숙해진 것이다 모진 바람과 따가운 햇볕과 온갖 벌레로부터 산책을 하다가 이름 모를 나무에 빼곡히 매달린 작은 열매를 본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 없이 빨갛게 열매로 타오르는 것들 지나가는 이의 시선을 모으거나 새나 벌레의 먹이가 되거나 이도저도 아닌 시간 속에 머물다 떨어질지라도 열매는 두려움이 없다 이름 없는 나무의 열매로 맺히기까지 그 모든 것들로부터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낙과로 마지막을 장식할지라도 미련이나 두려움 없이 뛰어내릴 수 있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