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류근- 반가사유 -류근-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 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 내가 읽은 시 2015.09.30
오탁번-해피 버스데이- 해피 버스데이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내가 읽은 시 2015.08.05
숲에 관한 기억-나희덕- 숲에 관한 기억 -나희덕(1966~ ) 너는 어떻게 내게 왔던가? 오기는 왔던가?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처럼?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젖은 나비 날개처럼? 숲을 향해 너와 나란히 걸었던가? 꽃그늘에서 입을 맞추었던가? 우리의 열기로 숲은 좀더 붉어졌던가? 그때 너는 들었는지? 수천 마리 .. 내가 읽은 시 2015.08.04
저녁비-정수자- 저녁비 -정수자(1957~ ) 다 저녁때 오는 비는 술추렴 문자 같다 골목집 들창마냥 마음 추녀 죄 들추고 투둑, 툭, 젖은 섶마다 솔기를 못내 트는 누추한 추억의 처마 추근추근 불러내는 못 지운 눈빛 같다 다 저녁때 드는 비는 내 건너, 부연 등피(燈皮)를 여직 닦는 그대여 내가 읽은 시 2015.08.04
달팽이 약전-서정춘- 달팽이 약전(略傳) -서정춘(1941~ )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이는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이 있었다 내가 읽은 시 2015.08.04
빗방울-오규원- 빗방울 -오규원(1942~2007) 빗방울이 개나리 울타리에 솝-솝-솝-솝 떨어진다 빗방울이 어린 모과나무 가지에 롭-롭-롭-롭 떨어진다 빗방울이 무성한 수국 잎에 톱-톱-톱-톱 떨어진다 빗방울이 잔디밭에 홉-홉-홉-홉 떨어진다 빗방울이 현관 앞 강아지 머리통에 돕-돕-돕-돕 떨어진다 내가 읽은 시 2015.08.04
범인-신미균- 범인 -신미균(1955~ ) 시커먼 홍합들이 입을 꼭 다물고 잔뜩 모여 있을 땐 어떤 것이 썩은 것인지 알 수 없다 팔팔 끓는 물에 넣어 팔팔 끓인다 다들 시원하게 속을 보여주는데 끝까지 입 다물고 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간신히 열어보면 구린내를 풍기며 썩어 있다 내가 읽은 시 2015.08.04
오체투지-이수익- 오체투지 -이수익(1942~) 몸을 풀어서 누에는 아름다운 비단을 짓고 몸을 풀어서 거미는 하늘 벼랑에 그물을 친다. 몸을 풀어서, 몸을 풀어서, 나는 세상에 무얼 남기나. 오늘도 나를 자빠뜨리고 달아난 해는 서해바다 물결치는 수평선 끝에 넋 놓고 붉은 피로 지고 있는데. 내가 읽은 시 2015.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