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109

위대한 욕-이향란-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9) 위대한 욕 이향란(1962~ )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 아이들이라곤 전혀 없는 놀이터를 둘러보다가 ‘죽일 년’ 미끄럼틀 위 플라스틱 조형물에 달라붙어 풀썩대는 날것의 낙서를 본다 쌍욕을 본다 난데없이 날아든 돌멩이에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듯 ‘죽일 년’ 바닥에 꿇고 앉아 싹싹 빌고 싶어진다 어제의 실수와 회한과 경망과 양심 내일을 눈치 보는 죄마저 미리 고백하고 싶어진다 찢어진 눈매와 덧니 가득한 입의 표정으로 그네의 흔들림과 놀이터의 소음을 집어삼키지만 얼굴 없는 ‘죽일 년’ 무지막지한 생은 벌벌 떨다 사지가 잘린 채 떠돌고 놀이터의 난장을 보다 못해 내뱉은 누군가의 ‘죽일 년’은 가래침처럼 끈적끈적하게 세상 모퉁이에 쫘악 달라붙어 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

전화-박상천-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8) 전화 박상천(1955~ ) 아침이면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그녀의 이름이 몇 번쯤 찍혔는지에 따라 전날 밤 나의 술 취한 정도를 가늠하곤 했다. 술에 취해 어딘가에서 졸고 있을지 모를 나를 위해 응답 없는 전화를 계속 걸어대던 아내. 이젠 전화기에 그의 이름이 뜨지 않은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난 아직 그의 번호를 지우지 못한다. 번호를 지운다고 기억까지 지울 수 없을 바엔 내게 관대했던 미소와 아직 생생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맙고 미안했던 그녀에게 응답 없는 전화라도 걸고 싶기 때문이다. 그곳, 아내의 전화기엔 나의 이름이 뜨고 있을까?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8번째 시는 박상천 시인의 “전화”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랑 속에서 삶을 영위합니다..

부리나케-이성수-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7) 부리나케 이성수(1964~ ) 엄마 보고 달려오던 아이 제 발에 걸려 코가 깨졌다 꽃이 오는 속도 봄이 피는 온도 꽃피 쏟아져 울음 벙그는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7번째 시는 이성수 시인의 “부리나케”입니다. ‘부리나케’의 사전적 의미는 ‘서둘러서 아주 급하게’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어원을 살펴보면 ‘불이 나게’인데, 옛날 옛적에 부싯돌을 사용하여 불을 지피려면 매우 빠르게 움직여야 했는데, 이 ‘불이 나게’가 음운변화를 일으켜 ‘부리나케’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어릴 적 학교를 마치면 바람보다도 빠르게 집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엄마 젖이 항상 모자랐던 필자는 집 대문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가방을 내동댕이치며 “엄마 젖, 엄마 젖”했다..

남편-안규례-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6) 남편 안규례(1961~ ) 얼룩으로 찌든 운동화를 빤다 미지근한 물에 담갔다가 긴 솔로 앞코부터 쓱쓱 문지르면 남자의 이른 새벽이 스멀스멀 빠져나와 고무다라 속을 까맣게 물들인다 운동화 뒤축까지 꼼꼼히 빨다 보면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린 가쁜 숨소리 빠져나오고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다 만취해 택시 기사와 다투던 폭언 퇴근길 축 늘어진 어깨가 맥없이 빠져나와 귀가를 하는 남자 이른 새벽이 오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신발 끈을 조인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6번째 시는 안규례 시인의 “남편”입니다. 며칠 전 딸과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필자가 아직도 꼰대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기와 수도를 아껴야함을..

급훈 뒤집기-박완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5) 급훈 뒤집기 박완호(1965~ ) 급훈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 숙여서 발을 보지 말라. 당연하다는 듯 누구에게나 별을 보라고, 별만 보라고 서로 얼마나 다그쳐왔던가? 되려 이제는 고개 숙여 발을 보라고, 제 발에 뭐가 묻었는지 어디를 무엇을 밟아가며 여기까지 걸어왔는지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때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든 제대로 가기 위해선 별을 올려보듯 발을 봐야 하리 고개 숙여 제 발을 보는 사람만이 마음속에 뜨거운 별을 마주치게 되리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5번째 시는 박완호 시인의 “급훈 뒤집기”입니다. 초등학교를 비롯한 중학교, 고교 시절은 삶의 지표를 세우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담임선생님이나 각 학과 선생..

친목계-배선옥-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4) 친목계 배선옥(1964~ ) 우리끼리 최저임금에 딱 맞춰진 일당에 대해 얘기하던 참이었다 허리가 아파 몇 날을 쉬었더니 월급이 형편없어져서 이번 달은 사는 게 팍팍하다는 볼멘소리를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듣던 참이었다 그나마 나이도 많아 이 짓거리도 언제까지나 하려는지 그 다음엔 또 어떻게 살려는지 모르겠다는 한숨을 겨울날 온 김 쐬듯 어깨를 수그려 듣던 참이었다 우리들의 낮은 테이블 위로 매우 화사한 웃음이 잠깐 지나갔고 땡감을 씹은 듯 아린 침묵이 한참을 함께 앉았다가 갔다 오장육부에 확 불이 붙으라고 생소주라도 한 잔씩 마시면 좋으련만 일용할 양식과 소주 한 잔을 바꾸어가기엔 내일이 너무 비싸다며 입맛만 다시던 김 여사 박 여사 최 여사 우리 그냥 맹숭맹숭..

귤 한 봉지-이태연-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3) 귤 한 봉지 이태연(1964~ ) 사무실 빌딩 지하2층 주차장과 붙은 쓰레기 분리수거장 근처에서 뵐 때마다 자동으로 고개 숙여 인사드리는 청소아주머니 계시다. 입시 한파 몰아친 영하의 아침, 유난히 분주해 보이는데 그래도 인사하려 한참 눈맞춤 실랑이 끝에 뭘 손에 들고 바삐 내게로 온다. 1차로 검은 비닐봉지에 꽁꽁, 2차로 쇼핑백에 담은 제주산 귤 가득 안기고 도망치듯 가시네. 엄중한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첫날에도 또 나는 살아갈 이유를 만난다. 테스 형! 세상이 와 이리 따시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3번째 시는 이태연 시인의 “귤 한 봉지”입니다. 사람마다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긴 선물에 대한 추억은 있을 것입니다. 그 추억은..

안부-나호열-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2) 안부(安否) 나호열(1953~ ) 안부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안부는 별 일 없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묻는 일 안부는 잘 있다고 이러저러하다고 알려주는 일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 안부를 기다리는 사람과 안부를 묻는 사람의 거리는 여기서 안드로메다까지 만큼 멀고 지금 심장의 박동이 들릴 만큼 가깝다 꽃이 졌다는 슬픈 전언은 삼키고 꽃이 피고 있다는 기쁨을 한 아름 전하는 것이라고 안부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날마다 마주하는 침묵이라고 안부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안부는 낮이나 밤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리지 않고 험한 길 만리 길도 단걸음에 달려오는 작은 손짓이다 어두울수록 밝게 빛나는 개밥바..

여자들은 좋겠다-김용만-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1) 여자들은 좋겠다 김용만(1956~ ) 아내와 아내 지인들이 이박 삼일 놀다 갔다 여자들은 좋겠다 밤새 수다 떨고 아침에 또 떤다 술 없이도 지치지도 않는다 안 싸우고 잘 논다고 밥 해줬다 쑥국도 끓여줬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1번째 시는 김용만 시인의 “여자들은 좋겠다”입니다. 출근해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 근처 남산골한옥마을로 산책을 갔습니다. 가을 끝머리를 장식했던 단풍이 이제는 낙엽이 되어 바람 따라 흩날리고 있는 그 모습이 무척 보기 좋습니다. 봄의 신록은 희망처럼 보여 좋고, 가을의 단풍은 생을 잘 마무리하는 것 같아 신록 이상으로 좋아 보입니다. 종종 젊은 연인들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짝을 이룬 노부부에게 눈이 자꾸 가는 이유를 모르..

바람이 되어-정순옥-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0) 바람이 되어 정순옥(1960~ ) 봄 내음 가득 담아 발길 닿는 대로 너에게로 가고 싶다 그리움을 풀어 놓은 향기 속에 녹아내리는 뜨거운 가슴 붉게 익어버린 홍시 하나 수줍음에 바람이 되어 눈이 덮인 소나무 가지를 흔들어본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0번째 시는 정순옥 시인의 “바람이 되어”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연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 비해 나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온갖 만물 중 인간만이 자연에 빙의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천둥, 번개, 하늘, 신선, 구름, 물, 새, 꽃, 바위, 나무 등등 수도 없이 많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