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3)
귤 한 봉지
이태연(1964~ )
사무실 빌딩 지하2층
주차장과 붙은 쓰레기 분리수거장
근처에서 뵐 때마다 자동으로 고개 숙여
인사드리는 청소아주머니 계시다.
입시 한파 몰아친 영하의 아침,
유난히 분주해 보이는데
그래도 인사하려 한참
눈맞춤 실랑이 끝에
뭘 손에 들고
바삐 내게로 온다.
1차로 검은 비닐봉지에 꽁꽁, 2차로 쇼핑백에 담은
제주산 귤 가득 안기고 도망치듯 가시네.
엄중한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첫날에도
또 나는 살아갈 이유를 만난다.
테스 형!
세상이 와 이리 따시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3번째 시는 이태연 시인의 “귤 한 봉지”입니다.
사람마다 가슴속에 긴 여운을 남긴 선물에 대한 추억은 있을 것입니다. 그 추억은 시간의 오래됨과는 상관없이 우리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필자는 20층 높이의 아파트 중 3층에 살고 있습니다. 두어 해 전, 바로 위인 4층이 이사를 왔는데 서너 살 먹은 사내아이가 밤낮으로 잘도 뛰놉니다. 쿵쾅거림이 몹시 심했지만 우리 부부는 우리 아이들같이 생각하자며 싫은 기색을 전혀 내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길에서 4층 새댁을 만났는데 다음날 이사를 간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곤 그날 저녁에 고구마 한 부대를 가지고 꼬마 손을 잡고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고마웠노라며 꼬마와 깍듯하게 감사 인사말까지 전하고 갔습니다. 우리 부부는 요즘 사람 같지 않은 새댁의 마음씨를 칭찬하며 맛있게 고구마를 쪄먹었습니다.
필자의 서재 한 쪽에는 A4 용지 1,000장이 정성스레 포장돼 있는 선물 상자가 대학 졸업 후부터 지금까지 놓여 있습니다. 졸업 당시 후배가 흰 종이에 가득 시를 쓰라고 주문하며 준 졸업선물입니다. 이사를 하면서도 갸륵한 후배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담은 선물은 이처럼 세상을 살맛나게 합니다. 여기 “귤 한 봉지”는 “엄중한 코로나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만”나게 합니다. “제주산 귤 가득 안기고 도망치듯 가시”는 “청소아주머니”는 우리 시대의 다정한 이웃입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마력을 폴폴 풍기고 있습니다.
“세상이 와 이리 따시노”라며 이웃과 따뜻한 정을 교류하는 시인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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