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남편-안규례-

불량아들 2022. 6. 2. 11:17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6)

 

남편

안규례(1961~ )

 

얼룩으로 찌든 운동화를 빤다

미지근한 물에 담갔다가

긴 솔로 앞코부터

쓱쓱 문지르면

남자의 이른 새벽이

스멀스멀 빠져나와

고무다라 속을 까맣게 물들인다

 

운동화 뒤축까지 꼼꼼히 빨다 보면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린

가쁜 숨소리 빠져나오고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다

만취해 택시 기사와 다투던 폭언

퇴근길 축 늘어진 어깨가

맥없이 빠져나와 귀가를 하는 남자

 

이른 새벽이 오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신발 끈을 조인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6번째 시는 안규례 시인의 남편입니다.

 

며칠 전 딸과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필자가 아직도 꼰대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기와 수도를 아껴야함을 우리 세대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딸은 그런 것보다는 철저한 쓰레기 분리수거와 같은 환경 문제와 세대 간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중요도를 더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딸과 같은 생각을 하는 세대와, 물자가 부족해 절약만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해왔던 우리 세대는 간극을 좁히기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생각의 간극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가족은 누가 뭐래도 부부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가장의 권위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가장의 책임의 무게를 잘 알고 이해하는 아내가 있다는 것은 가장으로선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더구나 속옷까지 빨래방에 맡긴다는 요즘 세태 속에서도 얼룩으로 찌든 운동화를빠는, 내조하는 아내가 있다는 것은 축복에 다름 아닙니다.

 

고무다라 속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는 것은 가장의 노고를 이해하는 아내의 마음입니다. 그런 아내와 가족들이 있기에 가장은 다시 신발 끈을 조이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팍팍한 삶이 2년 이상 지속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겠지만 가족의 삶의 질을 책임져야 할,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가장들이 느껴야 할 책임감은 형언하기 힘듭니다. 이러한 때, 이 시는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드리는 헌시나 같습니다.

 

맥없이 빠져나와 귀가를 하는 남자에게 가장 큰 보약이자 활력소가 되는 건 누구일까요? 역시 남자를 다시 달리게 하는 건 믿고 따르는 동반자인, 아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2년 5월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화-박상천-  (0) 2022.07.04
부리나케-이성수-  (0) 2022.06.02
급훈 뒤집기-박완호-  (0) 2022.04.04
친목계-배선옥-  (0) 2022.03.02
귤 한 봉지-이태연-  (0)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