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8)
전화
박상천(1955~ )
아침이면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그녀의 이름이 몇 번쯤 찍혔는지에 따라
전날 밤 나의 술 취한 정도를 가늠하곤 했다.
술에 취해 어딘가에서 졸고 있을지 모를 나를 위해
응답 없는 전화를 계속 걸어대던 아내.
이젠 전화기에 그의 이름이 뜨지 않은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난 아직 그의 번호를 지우지 못한다.
번호를 지운다고
기억까지 지울 수 없을 바엔
내게 관대했던 미소와
아직 생생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맙고 미안했던 그녀에게
응답 없는 전화라도 걸고 싶기 때문이다.
그곳,
아내의 전화기엔 나의 이름이 뜨고 있을까?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8번째 시는 박상천 시인의 “전화”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랑 속에서 삶을 영위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사랑, 형제자매 지간의 사랑, 이웃들과의 교류를 통한 사랑 등등...
그 중에서도 부부간의 사랑은 그 무엇에도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문화가 다른 환경에서 결합한 부부간의 삶은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가는 데 물리적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찰떡궁합을 위해선 선천적인 면도 필요하지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휴지를 걸어놓는 방향이 다르다든지, 치약을 짤 때 중간에서부터 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인의 삶을 이해하고 시인을 마치 자신의 일부처럼 인식했던 아내가 곁을 떠났나 봅니다. 살아생전 시인의 아내는 “술에 취해 어딘가에서 졸고 있을지 모를 나를 위해/ 응답 없는 전화를 계속 걸”곤 했네요. 술 취한 남편을 걱정하며 가슴 졸이는 시인의 아내는, 이 시대 우리 모두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내가 지금은 시인의 곁에 없습니다. 술에 취해 있어도 아내는 염려의 전화를 하지 않습니다. “관대했던 미소와”, “생생했던 목소리”는 아직도 눈앞에, 귓가에 생생한데 아내의 부재는 “전화기에 그의 이름이 뜨지 않”음을 통해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아내의 부재를 통해서 생전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배가 됩니다.
아내가 서럽도록 그리운 날엔 “응답 없는 전화라도 걸고 싶”지만 현실에서는 그리움을 목안 깊숙이 삼켜야 합니다. 시인은 그리움을 달래려 하늘을 응시합니다. 그러곤 하늘의 아내를 향해 애절한 기도를 합니다. “아내의 전화기엔 나의 이름이 뜨고 있”기를 바란다고...
읽을수록 가슴이 먹먹해지는 박상천 시인의 “전화”였습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2년 7월호, 창간 23주년 기념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욕-이향란- (0) | 2022.08.16 |
---|---|
부리나케-이성수- (0) | 2022.06.02 |
남편-안규례- (0) | 2022.06.02 |
급훈 뒤집기-박완호- (0) | 2022.04.04 |
친목계-배선옥- (0) | 2022.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