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위대한 욕-이향란-

불량아들 2022. 8. 16. 13:29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9)

 

위대한 욕

이향란(1962~ )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

아이들이라곤 전혀 없는 놀이터를 둘러보다가

 

‘죽일 년’

 

미끄럼틀 위 플라스틱 조형물에 달라붙어 풀썩대는

날것의 낙서를 본다

쌍욕을 본다

 

난데없이 날아든 돌멩이에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듯

 

‘죽일 년’

 

바닥에 꿇고 앉아 싹싹 빌고 싶어진다

어제의 실수와 회한과 경망과 양심

내일을 눈치 보는 죄마저 미리 고백하고 싶어진다

 

찢어진 눈매와 덧니 가득한 입의 표정으로

그네의 흔들림과 놀이터의 소음을 집어삼키지만

얼굴 없는

 

‘죽일 년’

 

무지막지한 생은 벌벌 떨다

사지가 잘린 채 떠돌고

 

놀이터의 난장을 보다 못해 내뱉은 누군가의 ‘죽일 년’은

가래침처럼 끈적끈적하게

세상 모퉁이에 쫘악 달라붙어 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9번째 시는 이향란 시인의 “위대한 욕”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누군가로부터의 욕으로, 누군가로의 욕으로 가득한 세상처럼 보입니다. 젊은 정치인은 젊은 정치인대로 기성정치인은 기성정치인대로, 여, 야를 막론하고 상대편을 향해 막말을 발사하고 있습니다. 수준 이하의 막말 잔치를 보며 혀를 차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욕이 전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릴 적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욕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이런 정서를 바탕으로 몇 년 전에는 욕설을 주제로 하는 영화가 나오는가 하면 욕 대회가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으니, 욕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의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욕먹을 행위를 되도록 해서는 안 되겠지만, 욕을 먹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유지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의 품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이 됩니다.

 

어린 아이를 구타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철면피나, 많은 서민들에게 사기를 치고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자들은 어쩌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욕먹을 행동을 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인지했을 때 어떤 행동 양식을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반성 없이 변명으로만 사태를 해결하려면 아니 되겠지요.

 

“죽일 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욕설은 타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욕설로 인해 상대방이 어떤 심리가 되는지에 대해 욕을 하는 사람은 알고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왕 할 욕이면 “위대한 욕”을 하여 우리 사회를 좀 더 여유롭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 시를 읽으며 해봅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2년 8월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화-박상천-  (0) 2022.07.04
부리나케-이성수-  (0) 2022.06.02
남편-안규례-  (0) 2022.06.02
급훈 뒤집기-박완호-  (0) 2022.04.04
친목계-배선옥-  (0) 2022.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