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하얗게-한영옥- 다시 하얗게 -한영옥-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가르며 기차 지나가는 소리, 영락없이 비 쏟는 소리 같았는데 또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깔고 저벅대는 빗소리, 영락없이 기차 들어오는 소리 같았는데 그 밤기차에서도 당신은 내리지 않으셨고 그 밤비 속에서도 당신은 쏟아지지 않으셨고 .. 내가 읽은 시 2013.05.16
빗소리-박형준- 빗소리 -박형준- 내가 잠든 사이 울면서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여자처럼 어느 술집 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거의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술잔을 손으로 만지기만 하던 그 여자처럼 투명한 소주잔에 비친 지문처럼 창문에 반짝이는 저 밤 빗소리 내가 읽은 시 2013.05.16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내가 읽은 시 2013.05.16
아, 둥글구나-알34 -정진규- 아, 둥글구나 ―알 34 -정진규- 우리는 똑같이 두 팔 벌려 그 애를 불렀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애가 풀밭을 되똥되똥 달려왔다 한 번쯤 넘어졌다 혼자서도 잘 일어섰다 그 애 할아버지가 된 나는 그 애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들고 있었고 그 애 할머니가 된 나의 마누라는 그 .. 내가 읽은 시 2013.05.16
어떤 평화-이병일- 어떤 평화 -이병일- 오일마다 어김없이 열리는 관촌 장날 오늘도 아홉시 버스로 장에 나와 병원 들러 영양주사 한대 맞고 소약국 들러 위장약 짓고 농협 들러 막내아들 대학등록금 부치고 시장 들러 생태 두어마리 사고 쇠고기 한근 끊은 일흔다섯살의 아버지, 볼일 다 보고 볕 좋은 정.. 내가 읽은 시 2013.05.16
수면-권혁웅- 수면 -권혁웅- 작은 돌 하나로 잠든 그의 수심을 짐작해보려 한 적이 있다 그는 주름치마처럼 구겨졌으나 금세 제 표정을 다림질했다 팔매질 한 번에 수십 번 나이테가 그려졌으니 그에게도 여러 세상이 지나갔던 거다 내가 읽은 시 2013.05.16
꽃들-문태준- 꽃들 -문태준- 모스끄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꽃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처럼 크고 찬찬한 .. 내가 읽은 시 2013.05.16
우주의 어느 일요일-최정례- 우주의 어느 일요일 -최정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별빛이 달려오는데 왜 이렇게 밤은 캄캄한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런 말도 했다 그것은 아직 별빛이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주의 어느 일요일 한 시인이 아직 쓰지 못한 말을 품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의 말을 품고 있는데 그.. 내가 읽은 시 2013.05.16
담배꽃을 본 것은 -나희덕- 담배꽃을 본 것은 -나희덕- 마흔이 가까워서야 담배꽃을 보았다 분홍 화관처럼 핀 그 꽃을 잎을 위해서 꽃 피우기도 전에 잘려진 꽃대들 잎그늘 아래 시들어가던 비명소리 이제껏 듣지 못하고 살았다 툭, 툭, 목을 칠 때마다 흰 피가 흘러 담뱃잎은 그리도 쓰고 매운가 담배꽃 한줌 비벼서.. 내가 읽은 시 2013.05.16
피리-전봉건- 피리 -전봉건- 대나무 잎사귀가 칼질한다. 해가 지도록 칼질한다 달이 지도록 칼질한다 날마다 낮이 다 하도록 칼질하고 밤마다 밤이 다 새도록 칼질하다가 십 년 이십 년 백 년 칼질하다가 대나무는 죽는다. 그렇다 대나무가 죽은 뒤 이 세상의 가장 마르고 주름진 손 하나가 와서 죽은 대나무의 뼈 단.. 내가 읽은 시 2011.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