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둥글구나 ―알 34
-정진규-
우리는 똑같이 두 팔 벌려 그 애를 불렀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애가 풀밭을 되똥되똥 달려왔다 한 번쯤 넘어졌다 혼자서도 잘 일어섰다 그 애 할아버지가 된 나는 그 애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들고 있었고 그 애 할머니가 된 나의 마누라는 그 애가 좋아하는 바나나를 들고 있었다 그 애 엄마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빈 손이었다 빈 가슴이었다 사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달려온 그 애는 우리들 앞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초콜릿 앞에서 바나나 앞에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제 엄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본시 그곳이 제자리였다 알집이었다 튼튼하게 비어 있는, 아, 둥글구나!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빗소리-박형준- (0) | 2013.05.16 |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김선우- (0) | 2013.05.16 |
어떤 평화-이병일- (0) | 2013.05.16 |
수면-권혁웅- (0) | 2013.05.16 |
꽃들-문태준- (0) | 2013.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