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스크랩] 가슴속의 촉촉한 그 무엇

불량아들 2014. 4. 18. 11:54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시집을 내야지 욕심을 내보지도 않았다. 다만 무언가 촉촉하고 따스한 물건 하나를 품고 살아온 듯하다. 그것이 메말라 버석거리는  곳을 가슴을 적시고, 싸늘한 냉기를 녹였다. 때론 숨어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 묵직하게 가슴 전부를 채우기도 하며, 살아있음을 드러내곤 했다. 그건 가끔 가슴 안에 갇혀 있지 못하고, 날개를 달고 밖으로 나간다. 나는 이것의 이름을 모른다. 이놈의 이름이 혹 詩는 아니었을까?

 

대학 동기가 시집을 냈다. (이완근, "불량아들", 문학의전당) 완주 비봉면이 고향인 이 친구는 말과 행동이 그대로 시였다. 2학년 때인가 단체로 씻김굿을 구경한 적이 있는데 굿판이 무르익자 무대로 올라가 무당과 함께 춤을 추던 장면이 생생하다. 완근은 샤먼이 되지 못한 샤먼이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 비봉면에 가서 하루를 묵었는데, 그날이 마침 동짓날이더라. 어머니께서 팥죽을 주시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그 양이 소 여물통으로 하나였다. 추운 겨울날, 친구 병현과 함께 그릇 안에 비추던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팥죽을 비우던 기억도 엊그제 같다. 내가 대학원을 다니며 헐떡거리는 사이에, 그는 잡지사를 운영하며 함민복 이윤학 등 꽤 이름이 알려진 시인들과 막걸리를 마셨다. 삶이 시인 친구가 문자 시집을 냈다니 무언가 어색하다. 문자 시? 껄쩍지근하고 겁나게 거시기한 그의 말과 짓에 미치지 못한다. 글이 어찌 짓만 하랴! 그래도 이렇게 문자로 그 짓과 삶의 일부를 토설해놓으니 아쉬운대로 증거가 되어 좋다. 더 부지런히 써서 내년쯤에 한 권 더 내라고 했다. 아직도 시를 품고 있는 내 동기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시집을 한 권씩 내면 좋겠다.

 

  맛있는 풍경

 

  팔월 늦여름

  잡풀이 우거진 아파트 공원 후미진 곳

  남녀 한 쌍이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하더니

  방금 들려오는 소리가

  지렁이 울음소리네 아니네 하며

  한바탕 웃음바가지를 쏟아내더니

  이내 한 입술이 된 두 사람

  무성했던 풀벌레 소리 잠시 멈추고

  바람도 휘돌아가네

출처 : 사림문로의 산책자
글쓴이 : 검하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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