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12-고정현 대표 편-

불량아들 2017. 8. 24. 11:10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12

 

미용업계의 근본은 사람과 인재 양성이다는 고정현헤어의 고정현 대표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이란 타이틀로 매달 우리 미용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미용인 한 분씩을 집중 인터뷰합니다. 기존의 미용인께는 성공에 대한 성취감을, 미용을 배우고자 하는 꿈나무들에게는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호에는 미용업계의 근본은 사람과 인재 양성이라는 소신을 가진 고정현헤어의 고정현 대표를 싣습니다.

   <이완근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alps0202@hanmail.net>

 

 

인천, 경기 지역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고정현헤어의 고정현 대표를 기자가 알게 된 것은 십 수 년 전의 일이었다. 1997년 여름, 기자는 취재 차 미국 LA를 처음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여러 미용인들을 만나 며칠을 함께 했었다. 당시 한인미용협회의 임원으로 있던 한 미용인과 몇 차례 술자리를 가졌었는데 그는 한국에서 미용을 하다가 LA로 건너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천에서 미용하는 고정현이라는 미용인을 아느냐며 한국에 가면 꼭 만나보라고 신신당부했다. 고정현 원장만큼 의리 있으며 실력 있는 미용인이 많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강조하면서 말이다.

기자는 그때는 고정현이라는 미용인을 모르고 있었다. 귀국해서 알만한 미용인들과 어울릴 때 그녀에 대해 물었다. 반반이었다, 그녀를 알거나 모르거나. 그러나 안다고 대답하는 미용인들은 그녀의 미모와 사람 좋음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 년 정도 후 기자는 고정현 원장의 숍을 찾았고 고정현 원장을 취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간간이 행사장에서 고정현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작년 연말에는 강남에서 미용계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을 모 미용인과 셋이서 만나 술도 한잔했다.

 

고정현 대표는 전남 담양 창평에서 한의원을 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서 두 딸의 막내로 태어났다. 언니와는 8살 차이가 났다. 한의원을 하시며 한학까지 공부하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여고를 졸업하기 1년 전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언니를 찾아 상경했다. 원래는 소설가가 꿈이었으나 언니의 권유로 미용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미아리에 있는 미용학원이었는데 그곳에서 헤어뿐 아니라 네일, 신부화장 등 기초적인 것을 배웠다. 미용이 맘에는 들지 않았지만 꾸준하게 배워 그 근처에 있는 미용실에도 취직했다.

언니가 인천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근거지를 인천으로 옮겼고 인천의 명동으로 불리던 신포동에 있는 미용실로 이직했다가 마침내 고정현헤어를 꾸린다.

 

이완근 미용을 하게 된 계기가 언니의 권유 때문이라고요?

고정현 그때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여성이 떳떳하게 활동을 할 직업이 많지 않았다. 타자수, 양재, 미용사 등이 그나마 전문 기술을 살려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직업군이었다. 많은 고민 끝에 언니의 권유로 미용을 배우게 되었다.

 

이완근 처음엔 서울에서 미용을 했지요?

고정현 서울에서 미용을 시작했다가 인천으로 이사를 와서, 당시 인천의 중심지였던 신포동의 헤어살롱에 1981년에 취업했다. 이후 1987, 인천에 내 이름을 걸고 고정현헤어를 오픈했다. 직원이 7명인 작은 숍이었다. 그 숍을 운영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1987년 오픈한 미용실은 건축업을 하던 남편이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84년 결혼했다. 신포동 숍에서 일할 때는 스타대접을 받던 헤어디자이너였지만 오픈 당시엔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때가 많았다. 아들을 맡길 곳이 없어서 미용실에 데리고 나왔는데 당시 3살이던 아들이 손님들이 오면 샴푸’, ‘샴푸하면서 고객들을 샴푸실로 인도했다고 한다. 그 아들이 지금은 고정현헤어의 본부장을 맡고 있다.)

 

이완근 대형 숍을 오픈한 게 언제인가요?

고정현 1994, 당시의 인천의 중심 상권으로 떠올랐던 부평으로 살롱을 옮기며 100평 규모의 대형 숍으로 확장했다 이때 많은 게 바뀌었다. 직원도 30여 명으로 늘었다.

 

이완근 대형 숍으로 변화를 주면서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고정현 숍을 대형으로 하면서 인테리어를 과감하게 바꿨다. 고객들의 필요에 맞게 직원들도 교육했으며 경영에 대한 공부도 이때 많이 했다. 토니앤가이라든지 비달 사순 등 배울 수 있는 곳에는 다 다녔다. 노력하자 고객이 늘었다.

 

이완근 남편 분이 오픈을 도와주는 등 도움을 많이 주었군요.

고정현 당시 남편은 멘토 역할을 다해주었다. 초기 미용실에 손님이 없을 때는 직접 전단지를 만들어 신문에 끼워 넣는 홍보도 도맡아 했다. 내게 어려운 문제가 봉착하면 상담사 역할을 자처했다. 남편이 오늘날의 고정현헤어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

 

이완근 지금도 멘토 역할을 하시나요?

고정현 지금은 내가 어떤 고민을 털어놓으면 나보다 잘 알면서 뭘 그래.’라고 애써 무시한다. 그만큼 나를 믿는 것 같다.

 

이완근 현재 고정현헤어는 어디까지 왔나요?

고정현 고정현헤어는 로컬을 기반으로 한 직영 브랜드다. 30년 가까이 살롱을 하나의 브랜드로 쌓아올리면서 함께 한 직원들은 가족과 같아서 그들은 이미 한 살롱의 원장이 되었거나,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우리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재를 키워내기 위하여 아카데미를 운영 중에 있고, 본사에는 교육, 인사, HRD사업, 제품개발, 경영지원 부서가 각기 살롱 경영의 백업을 맡고 있다. 모든 사업에는 사람이 중심이라지만 미용업계는 특히 사람이 가장 귀중한 바, 교육과 인재 양성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덕분에 현재 고정현헤어에서 근무하는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내부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완근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을 것 같은데...

고정현 말이라고 하겠나. 1994, 본점을 오픈했다. 당시로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100평 가량의 대형 숍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확장 이전을 했던 내게는 많은 고비가 왔다.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객들이 밀려들어왔으나, 교육, 서비스, 인사 등등 허술한 부분이 많아 그것은 곧 직원들의 이탈로 이어졌다. 그 넓은 매장에, 서른 명이 근무하던 살롱에 단 열 명이 남는 순간이 왔다. 이를 악물었던 순간이다. 그 때부터 인재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교육, 서비스, 미용 테크닉 등등 사람을 길러내기 위한 모든 것을 준비했다. 그 때의 고비가 많은 것들을 성장시켰다. 그 당시 남아있던 열 명은 지금도 모두 남아, 각 살롱의 원장이 되었다. 그들은 또한 우리의 시스템이 되었다.

 

이완근 사람을 중시하고 교육에 에너지를 많이 쏟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고정현 미용업계의 근본은 사람이고, 인재양성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인건비의 상승, 노무복지 문제 등으로 점차 사람을 키워내는 것을 꺼려하는 시대로 변하고 있다. 너무나 걱정되고 안타까운 일이다. 살롱 비즈니스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후진 양성이라고 생각한다. 후배를 가르치고, 후배가 자라나서 자신의 살롱을 갖게 하는 것이 나의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살롱 비즈니스 이상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이 교육의 길이다. 장차 글로벌 아카데미를 론칭하여 후배들과 함께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이완근 인천 지역 고급 백화점 등에 입점해 있는데 어떤 노하우가 있나?

고정현 노하우는 없다. 대신 우리 고정현헤어가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한다. 많은 고객을 유치함으로서 지역 경제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브랜드 파워도 막강한데 지역에서 외면하면 되겠는가, 우선권을 줘도 모자란다는 논리다. 내 말이 맞지 않나?

 

이완근 한국 ICD 회장도 맡고 있는데.

고정현 ICD KOREA는 오래전 한국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라는 세계본부의 결정 이후, 미용인들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한국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을 맡고 있는, 세계 부회장 카키모토 회장님이 이철 명예회장님에게 아시아 미용의 위상을 올리는데 함께하자라고 간곡히 요청하여 한국에서 지난 2013년 새롭게 시작하였다.

이철 명예회장님이 ICD KOREA의 기본틀을 탄탄히 갖추어서 시작을 하였다. 또한 그 어떤 단체보다도 많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브랜드 사들이 명예회원사로 도움을 주어 더욱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미용을 생각하는 마인드가 훌륭한, 배울 점이 많은 미용인들을 만나서 같이 활동을 하기에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

2017년에 연임을 하여 2대 회장에 이어, 3대 회장직을 맡았다. 더욱 단단하고 좋은 토양을 만들어서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자 한다. ICD 국제기구에는 기욤 파운데이션이라는, 젊은 미용인을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는 재단이 존재한다. 장차 한국에 기욤 파운데이션을 들여와서, 우리의 저변을 확대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사람과 함께하고 사람을 키워내는 것, 그것이 우리 미용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이완근 외모와 다르게 강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정현 나는 꾸준하고 진득했다고 생각한다. 누가 보면 미련한 곰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빠르지 못하고 한 길만 걸어왔다. 의심이 들었던 적도 있었고, 힘들었던 적도 있었으나 꾸준함만은 잃지 않으려고 했다. 다행히 지나보니, 맞는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쉽게 빨리 가는 길은 없다. 인생은 항상 제 값을 치르기 마련이다. 일로 매진하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으며 그렇게 살아왔다. 내면이 강하고 아름다워야 외모도 따라주는 거 아닌가.

 

이완근 미용하는 후배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은지...

고정현 고리타분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미용업계를 함께 만들어왔던 선후배의 관계가, 어느 순간부터 의미를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우리의 선배들은 우리 후배 미용인들을 이끌어줬다. 내 미용 인생도 선배 미용인 누군가가 이끌어줬고, 나 또한 후배들을 이끌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선배를 존경할 때 내 미용 인생도 꽃 피울 거라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우리 미용인 모두 참() 멋진 미용을 했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자존감을, 스스로의 위치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들 미용인 스스로 밖에 없다. 시장을 변질시키고, 스스로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정도를 걷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우리의 격을 높이는 것, 미용계가 지향하면 좋지 않을까.

 

고정현 대표와의 인터뷰는 한여름 밤의 소나기만큼이나 시원하게 진행됐다. 인천, 경기 지역을 기반으로 한 로컬 브랜드이지만 이제 고정현헤어는 내실을 다지고 기반을 넓혀서 전국적으로 그 세를 넓혀가는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우리 미용계의 성장과 함께 고정현헤어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한다.

 

<뷰티라이프> 2017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