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둡시다

[스크랩] 돈 이야기

불량아들 2006. 4. 25. 12:41
http://blog.naver.com/pigty04/140014431239

 

우리나라의 돈은 최초로 10세기 고려 성종 때 무쇠로 주조한 철전인 동국중보가  잠깐 유통된 적이 있으나 곧 중지 되었습니다.  여전히 교환의 수단은 현물이었고 규모가 큰 거래는 금이나 은을 사용했습니다.

 

고려 숙종 때 대규모 거래를 위해 은병(銀甁)을 주조했는데 은 1근을 병 모양으로 만들어 유통시켰습니다.  주둥이가 넓은 병 모양을 하고 있어서 은병을 활구(闊口)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다만 그 가치가 쌀 수십 석(石)에 해당하는 고액이라 보조 화폐로서 동전인 해동통보, 동국통보등을 잇따라 주조하여 유통했습니다. 

 

조선 태종 때도 저화라는 일종의 지폐를 발행하는 등 간간히 화폐 발행 시도가 있었지만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화폐경제로의 이전은 진전되지 못하고 일반 민중은 여전히 포목과 쌀 등 현물을 교환의 매개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화폐가 유통된 것은  17세기 조선 숙종 때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발행하기 시작함으로 비롯되었습니다.  구리 1근(600g)으로 동전 160개를 만들어 그 동전 1개를 1문(文), 혹은 1푼(分)이라 불렀습니다.  10문을 1전(錢)이라 하고 10전(錢)을 1냥(兩)이라 칭했습니다.  따라서 1 냥은 100 문이 됩니다. 

 

대개 동전 100 개를 꿰어 1냥의 꿰미를 만들어 세기 편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엽전을 꿰미돈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여기서 화폐단위 1냥과 중량단위 1냥은 다른 의미 입니다. (구별하기 위해 중량단위 1냥은 1냥쭝 이라고 합시다.)

 

상평통보는 법화(法貨)입니다.  즉 국가의 공권력으로 그 가치를 매긴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1문의 가치와 그 1문짜리 동전의 무게에 해당하는 재료(구리)의 가치가 같다면 그 화폐는 칭량화폐(稱量貨幣)가 되죠. 

 

조선조에서 1 냥의 가치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17세기 그리고 18세기를 통해  쌀 1섬의 가격이 대략 5 냥 전후였습니다.  물론 흉년이 들거나 하면 쌀값이 폭등하기도 했지만  

 

1 섬은 요즘은 두 가마니 즉 10말(斗)이지만 이건 일본식 도량형 단위이고 조선조 때의 쌀 1섬은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15말이었습니다.  1말은 요즘은 18 리터지만 역시 일본 도량형이고 조선시대의 1말은 학자들마다 의견차이가 있지만 대략 5 6 리터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량형은 대개 일제 강점기 이후에 도입된 도량형입니다.  조선시대 여자형사인 다모(茶母) 선발기준을 보고 놀라 자빠질  뻔 했습니다. 우선 키가 5척(150센티) 이상이 되어야 하고, 막걸리 세 대접을 앉은 자리에서 노털카에 얼굴 찡그리지 않고 홀짝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놀란 건 쌀 5 말을 머리 위까지 번쩍 들 수 있어야 한다는  체력조건이었죠.  쌀 5 말은 80킬로인데 역도 선수도 아니고... 무슨 저런 여자들이 있나 싶었는데 조선시대의 쌀 5말은 25킬로 정도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이 키가 9척이고, 82근 청룡언월도를 쓰고, 말술을 들이키는 묘사... 과장도 있지만 도량형 자체가 모두 현대와는 다른 것입니다.

 

각설하고.... 그러니까 1 말을 6 리터로 봤을 때  1 섬, 즉 15 말은 90 리터가 되죠. 요즘 치면 한 가마니 정도 입니다.  쌀 한 가마니 값이  요즘 한 30만원 한다고 하면 그 값이 5 냥일 경우 1 냥은 요즘 가치로 약 6만원이 됩니다.

 

실학자 박지원이 쓴  칼럼을 보니까 당시 (18세기 말 정조시절)  국경 밖의 책문(柵門)에서 밀무역에 사용되는 은 1냥쭝의 가치가 11냥 남짓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은 1 냥쭝은 쌀 두섬 값이 넘는다는 말이 되는데 요즘보다 은이 훨씬 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상평통보는 구리 1근(600 그램, =16냥쭝, 160돈쭝)으로 동전 160 개를 주조했습니다.  따라서 1문짜리 동전 한 개의 무게가 1돈쭝 즉 3.75그램이 됩니다.  1 냥은 동전 100 개니까  돈 1 냥의 무게는 375 그램, 200 냥이 되면 그 무게가 자그마치 75 킬로가 되어 사람의 몸무게 만큼 됩니다.

 

200 냥을 요즘 가치로 1,200만 원으로 본다면 당시 한 사람이 짊어지고 운반할 수 있는 돈의 한계가 1,200만 원이었다는 것이 됩니다.  만일 누가 지천으로 돈을 쌓아 주고 가져 갈 만큼 가져 가라고 해도 1,200만 원 이상은 못 가져 갔다는 것이죠.

 

지금은 차떼기 정치자금의 예에서 보듯이 1만원 권 2억 원이 든 사과 상자가 20 킬로그램이니 한 7억 원쯤 가져갈 수 있겠지요. 다이내스티 승용차를 이용하면 검찰이 권노갭씨 앞에서 증명했듯이 50억원을 가져갈 수 있겠지만( 쪽 팔려).

 

금이나 은으로 화폐를 만들어 썼던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엽전만 사용했으므로 화폐 경제는 그 만큼 더디었습니다. 

 

동전 즉 직전(直錢)이 그 무게로 인해 대규모 거래에 적합하지 못하므로 조선의 상인은 어음을 사용했습니다.  어음을 한자로 표기할 때 어음(於音)으로 썼는데 이는 즉 소리 나는 대로 적었다는 뜻입니다. 한자어가 아닌 순 우리말이라는 것이죠.

 

어음은 대개 A4지 절반 정도 크기의 종이에 발행자, 금액, 만기일 등을 쓰고 발행자의 도장이나 수결(手決=사인)을 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만 아주 고액권인 경우는 도자기로 구워 만들기도 했습니다. 사금파리 어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상업에서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은 상인들을 재우고 먹이는 숙박업, 물화를 임치하고 위탁 매매하는 거래 중개업, 어음을 교환하거나 금전을 대차하는 금융업 등 여러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돈이 없으면 신용을 바탕으로 어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거래를 하는 신용사회가 그 때 이미 정착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조선시대의 유명한 부자들은 초기에는 주로 대지주들이었습니다.  1 년에 수확하는 곡식으로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것이죠.  그러나  갈수록 상업 자본가가 거부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아직 화폐경제가 안착하기 이전에 초기의 상업자본은 역관들이 축적했습니다.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했던 통역사들이 그들인데 실물경제에 밝았고 언어소통이 자유로운 것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당시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의 경비로 각자 인삼 열 근 짜리 여덟 꾸러미 즉 80 근을 지참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인삼 여덟 꾸러미를 팔아서 여행 경비에 충당하라는 취지였는데 이 자금을 이용한 무역이라고 해서 이를 팔포무역 (八包貿易)이라고 하죠. 

 

당시는 인삼이 재배되기 전이라 100% 채취삼 즉 산삼이었고 인삼 80근의 가치는 은(銀) 2천 냥에 달했습니다. 물론 인삼 씨를 산에 뿌려 채취한 반(半) 자연산인 장뇌삼이지만.  인삼을 팔아서 생긴 은으로 비단이나 약재, 혹은 바늘(針)을 사서 귀국하면 몇 배의 차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역관 중 유명한 거부가 숙종때의 일본어 통역관 변승업이었습니다.  그는 청일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모았고 장안 제일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유명해서 부인이 죽었을 때 왕실 사람들처럼 관(棺)에다 옻칠을 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정 요로에 수만냥을 뿌렸습니다.

 

그는 남아도는 돈을 고리채로 놓았는데 그가 죽을 때 후손들이 보복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채권 문서를 모두 불사르게 하고 빚을 탕감시켜 버립니다. 이때 탕감된 총액이 은으로 환산해서 50만 냥이었다고 합니다.  변승업은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에게 10만 금을 빌려 주는 변부자의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16세기 이후 중국에는 서양으로부터 막대한 은(銀)이 유입되었습니다.  콜롬부스로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 이후 신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멕시코 은이 당시 제해권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 포르투갈로 흘러 들었습니다.

 

초기 150 년동안 1만 6천톤 이상의 은이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되었고 이는 유럽의 경제 질서를 새로이 개편해서 스페인의 페소화가 그때까지 국제결제의 중심화폐였던 오스만 제국의 화폐를 대체했습니다.

 

그런데 이 놈들은 이렇게 생긴 은으로 민간자본을 육성해서 국부를 도모하지 않고 왕실을 위한 사치품을 구입하는데 대부분을 썼습니다.  사치품 중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가 유명했고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으로 멕시코 은이 중국으로 유입된 것이며 또한 인삼 구입의 대가로 조선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당시 중국의  징더진(경덕진, 景德鎭) 도자기는 유럽 상류계층에 일종의 유행병이었고 도자기는 거의 보석에 준하는 가치로 거래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예 도자기를 차이나(China)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17세기에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도자기 기술을 도입하여 수출을 시작하고 유럽이 도자기 생산을 시작하기 전까지 중국 도자기는 독점적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신대륙 은의 3분의 1이 도자기 구입 대금으로 중국으로 유입되었습니다.

 

일본은 도쿠가와(德川) 막부가 들어서고 외국에 대해 쇄국정책을 취했습니다. 일본 상류층은 비단을 필요로 했는데 중국과의 직교역이 금지되자 이를 국교가 있던 조선상인을 통해 구입했습니다. 동래의 내상(來商)은 일본과의 무역에 두각을 보였는데 일본서 들어 온 은을 왜은(倭銀)이라고 불렀습니다.  18세기에 쇄국정책이 해제될 때까지 재미 봤지요.

 

18세기에 인삼이 대량 재배되기 시작하자 생산량이 폭등하였고 인삼은 조선의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임상옥 등 조선 후기 거부들은 대개 청국과 인삼무역을 하던 상인들이었지요.  인삼무역 허가증인 황첩(黃帖)을 따 내려면 100만 냥이 들 정도로 엄청난 특혜였지만 그걸 내고도 남는 장사였다니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였는지 알 만 하죠.

 

조선 상인의 또 한 축으로는 육의전 상인을 들 수 있습니다.  한양의 도성 안에 상설 시장을 개설하고 여섯 가지 품목을 취급하는 큰 상인 집단입니다.  지금의 종로 근처의 큰 대로가에 가가를 지어 놓고 상인들로 하여금 장사를 하게 하는 대신 세금을 거두고 관용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게 하는 어용 상인들이죠. 그들에게는 일반인이 도성 안에서 장사를 못하게 금하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는 독점적 권리가 부여되었습니다.

 

도성(4대문 안)의 금난전권을 회피하려다 보니 한양 주변에 큰 장시(場市)가 형성되었습니다. 충청, 경상도 등 내륙의 물화가 경기도 이천, 광주, 과천을 통해 집산되었던 송파 장터,  한강으로 올라 온 해산물, 소금이 거래되었던 마포, 서강, 용산의 어물객주,  경기 강원으로부터 뗏목으로 수송된 목재가 하역 되는 뚝섬의 시목(柴木) 시장, 원산으로 내왕하는 명태상인이 중간 기착하는 다락원(누원, 樓原), 그리고 한양 도성 내의 영세민이 필요한 물화를 구매하기 위해 남대문 밖에도 난전이 섰습니다.

 

육의전 상인들은 정부와의 유착 속에서 성장했기에 그들은 당쟁에 필요한 정치 자금의 주요한 조달처가 되었습니다.  또한  상인조합의 우두머리인 도령위(都領位)나 대행수(大行首)등의 임원을 선출하는 데도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정조는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금난전권의 혁파조치를 취하게 되고 육의전의 위상도 약화되었습니다.

 

상인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개성 상인입니다.  그들의 조합을 송방(松房)이라고 했는데 엄격한 신용과  절제된 거래 태도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들은 사개다리(四介置簿)라는 발달된 분개(分介), 기장(記帳)의 회계 기법을 운용했습니다. 서양식 복식부기와 같은  것이죠.  또한 전국적인 조직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어음은 요즘의 국공채와 같은 정도의 공신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주요한 상인으로는 개성 상인 외에도 서울의 경상(京商), 평양의 유상(柳商),  일본과 무역에 강세를 보인 동래의 내상(來商), 의주의 만상(滿商), 그리고 해운업에 종사했던 강상(江商) 등이 있었습니다.

사대부들의 돈과 상인에 대한 인식은 천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돈을 천하게 보면서도 공금은 잘라 먹고, 뇌물은 청해 먹었으니 조선 사대부의 이중적 행태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을 만지는 것을 더럽게 여겼음에도  관료들은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관료의 녹봉이 극히 박봉이었다는 것도 한 원인이 됩니다.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마빡에 어사화 꽂고, 가마 타고 장안 거리를 3일 유가 할 때만 하더라도 기분 째졌겠지만 첫 월급 명세서를 보는 순간 맥 빠지죠.  닝기리, 이게 뭐야

 

조선 관료들의 보수는 초기에는 과전(科田)이라는 땅에 대한 수조권을 주었으나 후기에는 직접 곡식이나 포목을 주는 녹봉제로 바뀝니다.  그리고 녹봉도 후기로 갈수록 대폭 삭감 됩니다. 재정이 점점 나빠져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료들의 급여 테이블을 보면 가령 세조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사헌부의 경우 종 2품의 연봉이 백미 12석,  현미 37석, 전미(田米) 2석,  보리 8석,  콩 17석, 명주 5필, 정포 14필, 저화 8장이었습니다. 지급시기는 1, 4, 7,11월 3개월 단위로 1년에 네 번 지급합니다.

 

그러던 것이 숙종 때부터는 매월 지급하는 것으로 텀이 바뀌었고 영조 때 편찬된 속 대전에는 봉급이 와장창 삭감됩니다.  정 1품의 최고 녹봉이 매월 쌀 2석 8두에 콩 1석 5두, 젤 말단인 종 9품의 월급이 쌀 10두에 콩 5두로 나와 있습니다. 

 

이를 연봉으로 환산하면 정 1품의 연봉이 쌀 30석 6두에 콩 18석이라는 얘긴데 초기의 종 2품 보다도 낮게 깎인 걸 볼 수 있지요.  영의정 연봉이 요즘 가치로  2천만원이 안 되었고 종 9품 말단의 경우는 연봉 500만원 수준이었단 것이죠.

 

그나마 흉년이 들거나 태풍으로 조운선(漕運 세곡 운반선)이 난파 되거나 하면 거기서 다시 삭감, 혹은 기약 없는 봉급체불이 있기도 했습니다.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이 쓴 글에도 박봉에 생활고를 한탄하는 글이 눈에 띕니다.  

 

아아 먼 시골에서 벼슬한답시고 서울로 올라와 1 년에 썩은 쌀 몇 섬을 받고 죽도록 뺑이 치는데, 올 해는 흉년이 들었다고 그나마 봉급을 깎자고 하니.씨바, 벼룩의 간을 내 먹지..

 

관료들의 일과는 휴일도 없이 (일요일 쉬는 제도가 도입된 게 갑오개혁 이후입니다) 아침 묘시(6시) 출근에 저녁 6시 퇴근하는 것인데 걸어서 출근하니 한 시간 빨리 나와야죠 물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두 시간 늦게 나왔습니다만 엄청난 격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박봉에 격무에 정조가 채제공에게 관노비 10 명을 하사하자 채제공은 그들을 하루 만에 돌려 보냅니다. 먹일 수 있는 양식이 없었거든요.  율곡 이이가 죽었을 때 장례비가 없었을 정도였고 황희는 비 새는 집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관료들의 생활수준이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폼 나게 사는 것을 보면 뇌물을 받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뇌물은 지방 관서의 서리(= 아전)들이 더 심했습니다. 

 

중앙 관서인 이, 호, 예, 병, 형, 공의 6조처럼 지방관서에도 수령 아래 6방 서리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중인 계급이죠. 이들은  보수 규정이 아예 없었으니 그냥 니들이 알아서 챙겨 먹어라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아전은 뇌물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탈하는 가렴주구의 현장 실무자였습니다.

 

서리들은 명확한 임용 기준도 없이 대개 세습되는 게 일반적이었고, 몇 대씩 가업으로 해 먹다 보니 그 지방 사정에 빠삭해서 어리버리한 신관 사또가 간혹 당하기도 합니다. 지방관은 동일 임지에 1000 일 이상 근무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업무 파악이 안 된 사또가 아전들에게 휘둘릴 수도 있는 문젭니다.

 

전국 8도의 8개 감영과 360개 고을에 6명씩 2천명이 넘는 아전이 봉급 없이 살았다는 것은 그들의 토색질을 정부가 묵인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아전으로부터 출발한 가렴주구는 수령에게 상납되고 방백으로, 중앙관서로, 왕실로 이어지는 상납고리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방관직 즉 외직에 딸린 놈들은 수령 아래의 6방서리에 국한되지 않고 무반(武班) 보직인 병사, 수사, 만호 등에 속한 놈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일반행정과, 사법과 군(軍)의 관할 범위가 엄밀히 구분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그런 구분이 그리 엄격히 적용되지 못했습니다.

 

가령 어떤 놈이 서울에서 무슨 잘못을 했다 치면 이놈을 잡아 족치는 곳은 포도청, 한성부, 훈련원, 의금부. 아다리 되는 데가 한 두군데가 아니죠. 대댕기는대로 아무 곳이나 잡아들여 뙤약볕 아래 꿇어 앉혀 놓고.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요즘으로 치면 시청 공무원이나 수방사 경비중대장이 민간인을 잡아 족치는 것과 같습니다.

 

조선시대 지방관, 그 중 최고 보직이 평안도 관찰사, 즉 평안 감사였습니다. 평안도 감영(도청)이 평양에 소재하고 있어 흔히 평양감사라고도 하죠.  조선시대 조세 징수는 거의가 현물세였으므로 세입과 세출을 총괄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요즘이야 모든 세수를 국세청이나 지자체에서 거둬 들여 예산회계에 따라 모든 지출을 집행하지만 그 때는 돈이 아니라 주로 곡식이었으므로 모든 세수를 서울로 운반하여 다시 모든 세출을 내려 보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지방 관서에서 세곡을 거둬서 일단 지방 관서 예산에 충당하고 나머지를 서울로 보내고 장부만 차액 정산하는 겁니다. 수령이 자기 월급을 자기가 징수한 세곡에서 받는 것이죠. 세곡의 운반은 전국의 강과 바다를 통해 조운선으로 운반해 용산과 서강에서 하역되었습니다.

 

그런데 평안도는 중국 접경 지역이고 중국 사신단이 내왕하는 길목이라 접대비 소요가 엄청 많았습니다. 그래서 평안도는 세곡을 중앙정부에 보내는 비율이 다른 도보다 월등히 적고 감사가 많은 부분을 자체 경비로 집행했습니다. 보직 중에 이만한 보직이 없지요. 평양에 기생집 등 향락 산업이 발달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정파의 인물이 평안 감사로 가느냐에 따라 정파의 희비가 교차되었지요. 당연히 당쟁에 필요한 중요한 정치자금의 조달처가 되었을 테니까.  평안감사 한 번 하고 나면 평생 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하는 일도 맨 날 술 상무 노릇이나 하고

 

조선사회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사회분류에서 최하층의 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대부는 돈을 휴대하거나 취급하는 것이 별로 점잖치 못한 것으로 여겨져, 주막에서 음식을 먹고도 계산은 수행하는 하예(下隸)가 했지요.

 

관리가 뇌물을 받을 때는 상인이 내미는 어음을 손으로 받지 않고 담뱃대로 끌어다 자기 방석 속으로 숨기곤 했습니다.  장죽(長竹), 즉 담뱃대로 어음 봉투를 보료 밑으로 살살 끌어 당기는 솜씨를 보면, 이 양반이 초짜인지 아니면 뇌물 받아 먹는데 이골이 난 고수인지 바로 구별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효종 때 북벌을 주도하던 관청인 어영청의 이완(李浣) 대장은 자주 은덩이를 휴대하곤 했습니다.  그가 무반이었고 통솔하는 군인들의 식사비나 경비 지불을 위해 필요한 행동이었지만 당시 조정 대신들은 이를 문제 삼아 씹은 기록이 있습니다.

 

돈이 이처럼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다 보니 더럽다는 표현을 구리다고 합니다.  돈 냄새는 동전의 재료인 구리 냄새, 즉 구린내라고 하고 동취 (銅臭) 라고 썼습니다.  도대체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 돈 냄새가 똥 냄새와 같이 인식되는 나라가 있습니까? 

 

서양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칼뱅에 의해 근로와 절약을 통한 정당한 부의 축적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는 이념적 토대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돈과 상인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하나의 원인(遠因)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끝)

 

산같이 높은 책상 바다같이 깊은 의자

뇌물은 청해먹고 공금은 잘라먹고

한손으론 노땡큐 다른 손은 땡큐땡큐

책상위엔 서류뭉치가 수북 책상밑엔 돈뭉치가 수북

수의계약 낙찰시켜 길 뚫리면 한몫 잡고……김지하, 오적

출처 : 뿌리깊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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