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면도를 하며

불량아들 2013. 1. 25. 15:57

 

면도를 하며

 

아침에 일어나 면도를 한다

밤새 충전해 두었던 면도기를

얼굴에 대자

거목 쓰러지듯 우렁찬 소리를 내는 녀석

시원한 삶의 현장

 

어제 아침

면도를 하려다가

앓아누운 할머니보다도 더 병약한 소리를 내는

전기면도기를 탓했었다

초벌 모내기 논만큼 띄엄띄엄 깎였었다

며칠을 쓰기만 했던 모양

밤새 전기를 주었더니

이 우렁찬 소리

 

면도를 하며

사람이나 동물이나 기계나

세상에서 활동하는 모든 것들

먹은 만큼 일한다는 사실을,

준만큼 보답한다는 사실을,

안다

세상의 이치 또 깨닫는다

 

출근길에

머리에 띠를 둘러맨 사람들

무엇인가 더 달라고 아우성하는 모습

보인다

 

 

 

  <뷰티라이프> 201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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