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박준 편-

불량아들 2016. 9. 2. 12:37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1

 

우리 미용계에 프랜차이즈 시대를 활짝 연 박준

 

이번 호부터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이란 타이틀로 매달 우리 미용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미용인 한 분씩을 집중 인터뷰합니다. 기존의 미용인께는 성공에 대한 성취감을, 미용을 배우고자 하는 꿈나무들에게는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 첫 번째로 우리 미용계에 프랜차이즈 개념을 도입한 박준 회장을 싣는다.<편집자주>

 

 

가수의 부푼 꿈을 안고 서울 행

우리 미용계에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처음 도입한 박준 원장은 1951712일 전남 해남군 마산면 용반리에서 아버지 박경종 옹과 어머니 오보인 여사의 4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나주, 일본, 만주 등을 떠돌며 막일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꼬마 박준의 어릴 적 별명은 길나발’. 밭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노래를 불러 제쳐서 생긴 별명이었다. 그의 어릴 적 꿈은 가수였다.

 

고향에서 허드렛일로 소일하던 그는 14살이 되던 해 서울 행 기차를 타고 야반도주했다. 가수의 부푼 꿈을 안고..... 서울 이모 집에서 며칠을 묵은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한다. 중부시장에서 기계 생산도 했고 동대문시장에서 신발 가게 점원 노릇도 했다. 아이스크림 장사, 구두닦이는 기본.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도 배워야 한다는 일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서울 출신같이 행동했고 사투리는 더욱 안 썼다.

 

운명과도 같았던 YMCA 미용실과의 조우

그가 22살이 되던 어느 날, 종로 2YMCA 건물에 있는 다방에 갔다가 우연히 미용실을 보게 되었다. 호기심으로 미용실 안을 들여다보던 그는 운명 같게도 미용이 하고 싶어졌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무조건 원장님을 뵙고 사정을 얘기하자고 결심했다.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웬걸, 그를 보자 원장께서 성실하게 생겼다며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했다. 그 원장이 다름 아닌 지금은 고인이 된 김옥진 전 대한미용사회중앙회장이다.

 

그는 미용실에 취직이 되자 잡일에서부터 무슨 일이든지 다했다. 그의 별명은 박오빠가 되었다. 미용실 여기저기에서 박오빠를 찾았다. 그러나 싫은 내색 하나 표내지 않고 일했다. 시간 틈틈이 샴푸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마네킹을 앞에 놓고 씨름을 했다. 손님은 하나, 둘씩 늘어갔고 손님들이 냄새나는 것을 싫어해서 담배도 딱 끊었다. 물론 남자가 머리한다고 그냥 나가는 손님도 없지는 않았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명동 퇴계로에 있는 <정화미용기술학교>에 등록해 1년 후에는 면허증과 함께 디자이너 자격까지 취득했다. 일주일 내내 미용실에서 일하며 공부한 결과였다. 그야말로 죽어라고 일과 학습을 병행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3년을 일하다가 명동에 있는 장금옥 원장이 운영하는 <조희미용실>로 옮겼다. 김옥진 원장의 미용실이 외제화장품을 쓰다가 적발돼서 1년의 영업정지를 맞은 시기였다. 그 당시는 외제화장품은 사용하지 못하게 법으로 금하던 시기였다. 20만원이던 월급을 50만원으로 올려받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김옥진 원장의 미용실이 영업정지를 받지 않았더라면 옮기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 당시 김옥진 원장에게는 정성스레 손 편지를 썼다. 미용실을 옮기고 나서도 김옥진 원장과는 사제지간의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했다.

 

조희에서 처음 일할 때는 그 전에 종로에 있었기 때문에 명동 손님이 거의 없었다. 고심 끝에 명함을 만들어서 식당 등을 돌며 뿌렸다. 신경성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면회객 하나 없는 병실에서 세상의 비정함을 처음 느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섰고 고객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조희에서 3년을 일하다가 하종순 원장의 <마샬미용실>로 이직했다. 마샬과 조희가 명동에서 쌍벽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어느 정도의 월급과 매출의 50%를 가지는 조건이었는데 순수입이 매월 400~500만원이나 되었다.

 

동메달 획득과 유명세

마샬에서의 생활은 그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했다. 외국에 나가 공부할 기회를 제공했으며, 1979년도에는 IBS 국내 예선 대회에서 2등을 했다. 마침내 1980년 뉴욕 IBS 대회에서는 퍼머넌트 부문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루었다. 비자 문제로 본진과 함께 출국하지 못 하고 혼자 미국 대사관까지 찾아가 항의한 끝에 가까스로 비자를 받아 대회 전날에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던 역경을 극복하고 따낸 동메달이었다.

 

메달을 따고 귀국하자 주간 여성, 주간 경향, 선데이 서울 등 국내 언론에서 난리가 났다. 이색 작업, 이색 남자로 소개하기에 바빴다. 눈, 코 뜰새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무언가 전기가 필요했다.

 

마침내 19817월, 명동 태극당 유니클로 맞은 편 <김정아의상실> 1층에 <박준미용타운>을 세우며 독립했다. 실 평수 기준 30여 평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부심은 대단했다. 이제 세상은 다 그의 거였다. 그의 행로에는 거침이 없었다. 대구 동미사 등을 위시하여 전국에 세미나 열풍을 몰고 다녔다. 비달 사순, 피봇 포인트 등에서 배운 실전 커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결혼과 성공

이듬해인 1983년에는 그 전 해에 메이크업으로 박준미용타운에 취업한 임승애 양을 만나서 결혼에 성공하기에 이른다. 영국에서 메이크업을 공부하고 온 임승애 양은 누가 봐도 엘리트였지만 둘이 눈이 맞아 도시락을 서로 싸오는 등 애정은 깊어만 갔다. 그러나 신부 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한 건 미래에 대한 확신이 확고했기에 가능했다.

 

1993년 박준미용타운은 청담동에 임시 미용실을 세워서 명동 시대를 고()하고 강남시대를 여는 예고를 선보인다. 그리하여 드디어 1995년 지금의 본사 자리에 땅을 매입하고 법인으로 <PNJ>를 설립한다. 전 세계가 우루과이라운드에 진입하면서 보호 무역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을 때 우리 것은 내가 지킨다.’는 인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부동산 투자를 멀리 했다. <박준뷰티랩>을 프랜차이즈로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직영점을 두지 않았고 백화점에도 입점하지 않았다. 대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헤어도 과학적으로 접근했고 어린이 놀이방을 만들어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방송의 위력

그는 예전부터 방송을 통한 PR 효과를 크게 누렸는데, 1982'KBS 비밀의 커튼에서 거꾸로 매달려서 커트를 하는 이른바 업 사이드 다운 컷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비밀의 커튼이후 타 방송에서도 출연 신청이 쇄도했는데 1999년 말 MBC성공시대는 방송의 위력을 여지없이 보여준 좋은 예였다. 이후로 <박준뷰티랩>은 전국적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영국으로의 유학

200017일, 그는 3년 예정으로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임승애 대표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앞으로 50년의 삶을 더 낫게 살기 위해 영어를 공부하며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월드컵을 보기 위해 20026월 귀국했다. 26개월 동안 그는 홈스테이를 하며 살리츠 살롱에서 현장 감각을 잃지 않으려 일을 했다. ‘얼터네티브 쇼를 참관하기도 했고 영국인의 절약정신을 배웠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미용 인생에 큰 값의 몫으로 남아 있음은 물론이다.

 

2002년 귀국 후, 그 해 12월 그는 하야트호텔에서 컴백 헤어 쇼를 열었다. 그다운 발상. 헤어 쇼는 성황을 이루었고 이는 박준페밀리데이를 매년 개최하는 계기를 마련함은 물론 다른 프랜차이즈 본사들도 이와 비슷한 행사를 여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외국 연수와 유학이 정례화하기도 한다.

 

2005년에는 원광대학교에 뷰티미용학과가 신설되어 이후 5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는 미용 교수가 되었으며, 201211월에는 서경대학교에서 미용 명예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달랐던 그였기에 뜻깊은 명예박사 수여였다.

 

인생의 질곡과 산티아고 성지 순례

탄탄하던 그의 행로에 암운이 드리운 것은 2013년 초였다. 여직원 성추행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검찰의 영장 실질 심사를 기다리며 그는 죽음을 생각했다. 매스컴의 온갖 소문에도 그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리라 굳게 믿고 또 믿었을 뿐이다. 무죄를 증명하는 영장 기각 후에도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낮에도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암울뿐이었다.

 

칩거를 거듭하다 백두대간 종주 계획을 세우고 해남의 선산에 참배를 드리러 갔다. 그리고 그때 근처의 소록도 담당자와 연결이 됐다. 6개월 계획으로 미용 기술 봉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보통은 2주인데 6개월 하기로 결심했다. 누구라고도 말하지 않고 봉사만 열심히 하고 있던 3개월쯤, 서울 소재 대학에서 안식년을 맞아 소록도에서 봉사하고 있던 교수가 그에게 선뜻 스페인 산티아고 성지순례를 제안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짐을 가볍게 하라는 그의 충고 하나만을 받아들고 짐을 싸 800km 38일 동안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눈썹 무게마저도 무겁게 느껴져 눈썹 한 가락이라도 밀어내고 싶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인생의 회환과 감동이 밀려왔다가 밀려가기를 몇 번, 마침내 그는 수면제 없이도 잠을 잘 수 있었다.

 

산티아고 성지 순례는 그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다. 산티아고에서 많은 인생을 보았고 삶의 진면목도 볼 수 있었다. 이승과 저승, 피안의 세상까지도 읽을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 후 그는 작년 8월 천주교 세례도 받았다. 지금은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매달 셋째 주에는 34일씩 소록도 봉사도 빼놓지 않는다. 이제 소록도에 열혈 팬들까지 생겼다. 모두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박준의 미용

그는 2015년 초 미용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수요일에는 예약 고객을 직접 받는다. 사회적 기업인 <조이비전>이라는 회사도 인수해 사회적으로 어려운 취약 계층의 교육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다. 그의 오랜 꿈인 미용대학을 만들기 위한 초석도 지금 다지고 있는 중이다. 프랜차이즈 본사로써 모든 직원들의 교육과 복지, 내실에도 신경 쓸 계획이다.

 

올해는 러시아의 오랜 미용 친구들인 게오르기 콧과 드미트리 등과 더욱 교류를 활발히 할 예정이다. 지난 해 콧을 초청하여 한국에서 그의 신비스런 업스타일을 선보였고 그의 초빙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앞으로 함께 많은 행사를 하기로 약속했다.

 

6월엔 러시아를 방문하여 드미트리와 공동으로 새로운 헤어 트렌드 14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두 사람이 공동 브랜드를 만들어서 전 세계를 상대로 프랜차이즈를 펼쳐나갈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 제품을 러시아의 상류충에 보급할 계획도 진행 중이다.

 

박준, 그는 가난의 어려움을 헤쳐 탄탄대로도 걸어봤고 인생의 가장 큰 시련도 슬기롭게 헤쳐오고 있다. 그가 미용계에 끼친 영향이 크지 않다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 미용계에 끼친 영향이 지대타 하겠다. ‘마이다스의 손이라 불리며 미용 문화를 꽃피웠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체계화된 프랜차이즈를 도입, 정착시킨 그는 한 명의 미용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

 

<뷰티라이프> 2016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