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 신용진 편-

불량아들 2016. 11. 1. 14:20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3

 

100인의 경영자와 300 가맹점 꿈꾸는 신용진 대표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이란 타이틀로 매달 우리 미용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미용인 한 분씩을 집중 인터뷰합니다. 기존의 미용인께는 성공에 대한 성취감을, 미용을 배우고자 하는 꿈나무들에게는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호에는 100인의 경영자와 300 가맹점을 꿈꾸는 ()뷰쎄 신용진 대표를 싣는다. <편집자주>

 

 

()뷰쎄를 이끌고 있는 신용진 대표의 고향은 전북 진안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장난을 좋아하는 개구쟁이였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전학 오기 전까진 우등생에 줄반장을 맡아 했다. 그러나 전학관계가 잘못되어 6개월간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탓과 낯선 환경은 공부와 거리를 멀게 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시작부터 꼬여갔던 것이다.

공부에 취미가 없으니 어울리는 친구들은 항상 착한 친구들 보다는 껄렁껄렁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절 다른 놈은 다 마음잡아도 저놈은 안 될 거야.”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사회에 나와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그는 어느 것 하나도 오래하지 못했다. 막연하게나마 외국에 가 살고 싶은 생각에 당시에 외국에 가면 취업하기 좋을 것 같은 일들만 골라 했다. 그 일은 샷시, 자동차정비, 인쇄, 금형, 목형, 파이프공장, 전기, 음악다방 DJ, 양장점 등등이었는데 일주일 만에 그만둔 곳도 있었고 길어야 한두 달만 다녔다. 그만둔 이유도 다양했다. 먼지가 많이 난다거나, 기름 냄새 맡기가 싫어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 싫어서, 전망이 없을 것 같아서, 그만둘 이유를 찾는 것은 지나가는 사람 머리수를 세는 것보다 많았다. 어느 곳에 입사해도 한두 달을 못 넘기고 그만두는 아들을 보며 부모님의 실망은 크셨다. 그리곤 한동안 더 이상 무엇을 해보라는 말씀도 안 하셨다.

 

민주화 요구가 빗발치던 83년 겨울, 급기야 사고가 터졌다. 불량한 친구 몇 명과 동네 선배들 간에 패싸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선배 하나가 많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해 동네 파출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 사고 이후 한동안 선배들이 집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바람에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 무렵 다니라는 직장은 그만두기 일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만치는 보며 거의 포기상태로 지내시던 어머님이 다른 제안을 하셨다. “큰집 사촌 조카 중에 부부 미용사가 있는데 미용실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단. 그러니 너도 미용을 해보면 어떻겠니?” 어머님의 충격적인 제안에 그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처음엔 어째서 어머니가 이런 제안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량아들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보고 미용사를 하라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친구나 선배, 후배들은 내게 뭐라고 것인가? 아마도 나는 조롱거리가 되고 것이다. 있을 없는 일이다.’라고 그는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께서는 시간 때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미용할 것을 권하였다.

계속된 권유에 귀찮아진 조건을 걸었다. 한 달만 다녀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니지 않아도 뭐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어머니께서 수용하고 나서 그는 미용학원에 접수했다.

 

그가 다닌 미용학원 지하에는 음악다방이 있었는데 지역에서는 가장 다방이었다. 그곳은 동네 건달들의 아지트였는데, 그곳에서 6개월간 DJ 봤던 곳이라 더욱 다니기 싫었다. 처음 3주간은 새벽에 학원에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 있다가 바로 집으로 퇴근했. 친구들에게는 지방에 있는 친척집에서 직장을 다닌다고 거짓말하고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친구들을 만났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지방에서 서울에 볼일이 있어 잠시 올라왔다고 거짓말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하는 걸 한사코 거절하다가 끝내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워낙에 술이 약했던 얼마 지나지 않아 취하게 되어 정신이 없었는데 장난기 많은 친구가 그의 가방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 가방이 열리는 바람에 마네킹과 롯드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네킹을 사람 머리로 오인한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고 술집은 아수라장이 되었.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화다.

 

일이 있고 뒤에 그는 여러 친구들로부터 조롱과 놀림을 받았다. 등록한 지 달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이상 학원을 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한 달만 다니고 그만둘 생각이었으므로 아쉬움은 없었다. 며칠 동안 학원에 나가지 않자 학원 원장이 집으로 찾아왔다.

 

학원에서 너무나 성실하게 노력했던 미스터 신이 학원에 나오지 않아 궁금해서 찾아왔다.” 원장은 그의 어머니께 말씀하셨다. 학원생 남자라고는 하나밖에 없었고, 누나뻘인 사람들이 많아 같이 어울리기도 어렵고, 밖에서는 친구들만날까 학원 안에서만 있었으니 원장은 그를 성실한 학원생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그때는 새벽반, 오전반, 오후반, 야간반이 바뀔 때마다 시간 간격으로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학원 밖으로 못 나가는 원장님, 선생님들과 같이 청소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하루 종일 같이 지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원장은 언제나 그를 착하고 성실하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자신을 알고 있었다. 남들이 마를 한 번 반도 말았고, 다른 사람들은 한두 번 만에 하는 것도 여러 번을 해야 겨우 있었다는 것을.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원장은 칭찬했 그런 원장의 칭찬이 그는 싫지 않았다. 집까지 찾아온 원장의 정성과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으로 그는 다시 미용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실기시험에서 한 번 떨어지고 6개월 만에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이렇게 미용인생이 시작되었다.

 

미용 자격증을 취득하고 그는 명동에 있는 미용실에 취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햇병아리에게 그런 자리는 없었다. 성북동에 있는 <정남숙미용실>에 취직했다. 당시 정남숙미용실의 원장은 스트레이트 퍼머와 노밴드 세미나 강사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전국 세미나에 열심히 따라다녔다. 세미나 보조 역할은 재미있었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밥 짓고 타올 빨래하던 생활에 질려 이대 앞에 있는 <전덕현미용실>로 옮겼다. 그곳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전덕현을 만났다. 1년여를 여기에서 일하다가 드디어 명동에 있는 <김선영미용실>로 이직했다. 김선영미용실에 다니며 <동해탕>이라는 사우나에 아침 일찍 자주 가곤했는데 그곳에서 지금은 <자끄데상주>, <오다헤어>의 대표로 있는 김진수, 이정수를 만났다. 당시 이정수는 기능대회 입상자였고 김진수는 미국 롱비치 대회 수상자였다. 기능대회를 준비하던 그는 이 둘과 어울려 ICD를 짊어지고 나갈 포부를 가지고 ICD 본부가 있는 파리를 방문하기도 했다. 젊음과 패기, 의욕이 충만한 시기였다.

 

그는 1986년에 ICD대회에 나가 퍼머 부문에서 은상을 타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87년도에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자니윤 쇼>에 김진수, 이정수와 셋이서 성공적인 헤어 쇼도 펼쳤다. 스튜디오 안 무대에 오토바이에 모델을 태우고 나가는 파격적인 무대였다. 자니윤 쇼 출연 이후 많은 방송에서 섭외가 쇄도했다.

 

6년을 명동 김선영미용실에서 근무했던 그는 1990년 강남에서 <제이신 헤어케어>라는 상호로 독립하며 오픈한다. 오픈 후 2년 동안 고생하며 드디어 1995년 압구정에 2호점을 내며 프랜차이즈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완근: 제오헤어는 어떻게 탄생했으며 일화가 있다면?

 

신용진: <XEO HAIR>라는 브랜드를 만들 때의 일입니다. 1997 우리나라 대표 프랜차이즈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6천만 원이란 큰돈을 들여 개발한 브랜드가 XEO HAIR입니다. 잠깐 브랜드 개발 당시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당시도 최고의 회사였고 현재까지 최고의 회사인 C사에 전화를 합니다. 제가 브랜드를 만들고 CI, BI 작업을 의뢰하고 싶은데요.” “~, 어떤 업종이시죠?” “미용실 프랜차이즈입니다.” “미용실이라고요?”

상대편에서 너무나 당황하는 목소리였습니다. 회사는 있으신가요? 매출액은 얼마나 되세요?”

아니요. 회사는 만들 겁니다.” “저희가 도와드리기 어렵겠습니다. 저희는 상시 종업원 200인 이상 매출액 200 이하의 회사 수주는 받지 않고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최고의 브랜드를 만들겠단 일념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광고 회사에서 상호를 만들고 싶었던 나의 생각은 우스운 이야기가 될 뻔했었지요.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어 조르고 조른 끝에 가장 많이 외주를 주는 업체를 소개받고 많은 협상을 거쳐 6천만 원에 네이밍, CI, BI 하기로 하고 이렇게 6개월 만에 XEO HAIR 탄생되었습니다.

 

이완근: 그 후론 어땠나요?

 

신용진: 5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2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었지요.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XEO HAIR 프랜차이즈 사업에 두각을 나타낼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사 멤버십 SK텔레콤의 TTL카드 멤버십 가맹점이 것이 그것입니다.

전 국민의 반이 SK텔레콤 가입자였고 50% 이상이 20대였지요. 그 당시 매장은 20 젊은 고객들로 넘쳐나고 이상 수용할 없을 정도였습니다.

2004 일본 미용인들과의 교류도 XEO HAIR 성공하기까지 많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중부대회를 벤치마킹해 뷰쎄 콘테스트 & 페스티벌을 2006년부터 올해까지 12년을 이어오고 있는데 올해는 300명이 넘는 참가자에 415 종목 출전을 이룰 만큼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완근: 프랑크프로보는 언제 론칭했나요?

 

신용진: 제오헤어에 있어 빼놓을 없는 하나의 사건은 FRANCK PROVOST(프랑크프로보) 칭한 것입니다. 2006 칭한 프랑크프로보는 잘 아시다시피 백화점, 대형 쇼핑몰, 대형 성권에 위치한 럭셔리 미용실 프랜차이즈입니다.

일본의 경영관리기법과 시대를 앞서가는 프랑스 트렌드를 바탕으로 선진 경영기법을 확립한 제오헤어는 어느 브랜드도 흉내내기 어려운 제오헤어 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매년 개최되는 뷰쎄 콘테스트와 파리 트렌드 연수, 일본 대회참가 등의 다양한 노력을 통해 한국 미용의 선진화와 미용사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완근: 현재 ()뷰쎄만의 현황과 장점이 궁금한데요.

 

신용진: 제오헤어는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81개의 가맹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프랑크프로보 13개점도 같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년 봄, 가을 발표되는 최신의 프랑크프로보 트랜드 교육과 뷰쎄 아카데미의 다양한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재들을 육성하고 있습니다. 특히 매년 개최되는 뷰쎄 콘테스트를 통해 일본 대회 참가와 파리 연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모든 매장의 직원들이 동일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는 프랜차이즈의 핵심인 표준화, 전문화, 단순화를 통해 외부의 어떤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영체제를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이완근: 대표님의 계획이 있다면?

 

신용진: 2020년까지 100명의 경영자와 300 가맹점을 목표로 사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2025년까지 브랜드 개발을 통해 한국 최초 500 가맹점의 신기원을 이루겠습니다.

유통회사를 설립해 가맹점에 양질의 제품을 낮은 코스트로 공급하고 고객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제품을 제안하는 회사가 되겠습니다.

 

이완근: 요즘 미용인들이 힘들어 하는데....

 

신용진: 세계적인 정치, 경제의 혼란으로 살롱 경영의 기복이 심해지고 경영의 코스트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살롱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다양한 욕구를 채워주기에 급급한 현실이 앞날을 암울하게 하기도합니다. 사회적인 제도도 현실에 미치지 못해 더욱 답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선진국의 예를 보면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직업은 로봇이 대체할 없는 되는 업종에 속합니다. 본인이 하기에 따라서 정년이 없습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세계적으로 뷰티 시장은 10% 이상씩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려고 하면 있는 방법이 보이고, 하지 으려고 하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새엔가 우리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완근: 좌우명이나 어려운 삶을 이겨나가는 극복법이 있다면?

 

신용진: 사는 것이 고비이고 하루하루를 넘기는 것이 극복인 같습니다. 수도 없는 고비와 위험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다 보면 지난 고비는 고비가 아니고 오히려 약이 되었던 경우가 많았던 같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되뇌는 말이 있는데

나는 운이 좋다. 나는 운이 좋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입니다.

나는 운이 좋다, 운이 좋다고 계속해서 말하면 운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다행이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이상 나빠지지 않고 정도인 것에 다행이어서 고맙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은 불행의 사슬을 끊는 말이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이 꿈꾸는 것이 이루어진 것을 상상하며 감사하다고 말하면 꿈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나를 지탱해준 행운을 부르는 마법의 입니다

 

이완근: 오랜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미용계가 나아가야 길이 있다면?

 

신용진: 나이키의 적은 아디다스나 다른 스포츠 업체가 아니고 닌텐도라는 이야기가 한참 회자된 적이 있었는데요. 우리 미용인의 적은 미용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미용인) 동업자라고 합니다. 우리 미용인이 분열하는 동안 우리 업의 영역이 얼마나 많이 줄어들었습니까? 메이크업, 에스테틱, 네일, 웨딩 등등 미용인의 적은 미용인이 아니고 우리의 영역을 파고드는 현재 들어와 있는 업들과 향후 미용업에 들어오게 다른 세력들입니다.

미용인이 같은 일을 하는 미용인을 협력자로 받아들이고 서로 협력해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국 미용인 파이팅입니다.

 

신용진 대표와의 만남은 미용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했다. 신 대표와 같이 미래 미용에 대해 포괄적으로 생각하는 미용인들이 많아질 때 우리 미용의 미래도 밝다 하겠다. 그의 고민의 깊이가 더 확장되고 넓어져서 미용인들이 동업자로서 함께 하는 날이 빨리 오를 기대한다.

 

신용진 대표 미용 연혁

 

1983- 미용계 입문

 

1987- ICD 국제미용대회 퍼머부분 은상수상

- 각종 미용대회 심사위원 및 헤어 쇼 연출

- 월간지 표지모델 및 화보촬영 다수

 

1989- [쟈니윤 쇼] [행운의 스튜디오] 등 유명프로그램 헤어 쇼 다수 출연

 

1990- <헤어케어> 압구정 점 오픈

 

1995- <헤어케어> 압구정 2호점 오픈

 

1997- 헤어케어를 현재의 제오헤어로 브랜드 명 변경

(프랜차이즈 시스템 개발 착수)

- 영화, 드라마, CF, 제작 다수참여

- SK멤버십 계약체결(업계최초)

 

1998쉬리, 퇴마록, 닥터K 등 영화 헤어 & 메이크업 담당

 

2002- 뷰쎄 제오헤어 프랜차이즈 본사설립

 

2005- 1뷰쎄 헤어 페스티벌&콘테스트 개최

 

2006- 유럽 최대의 헤어 살롱 <프랑크프로보> 국내 론칭

 

2007일본 중부 미용대회 참가 2, 3위 수상자 배출

 

2010- 파리 최대의 팔레 데 콩글레에서 한국인 최초로 유럽 미용인

5천 관중 앞에서 한국 대표로 헤어 쇼 연출

 

2011- 제주포럼 비즈니스 신 세력: 아시아청년 리더

- 아시아 3개국 뷰티산업의 미래 발표

 

2012일본 중부대회 30주년 참가 2위 수상자 배출

 

2014- 10뷰쎄 페스티벌, 콘테스트 개최(프랜차이즈 브랜드 최초)

- 파리 국제 강사초청 헤어 쇼 개최 (한강 세빛섬)

 

2015- 프랑크프로보 40주년 기념 헤어 쇼 한국대표 출전

 

2016일본 SUPER BEAUTY 2016 콘테스트 참가

) 제오헤어 81개점 프랑크프로보 13개점

 

<뷰티라이프> 201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