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 남편
우리 남편은 오늘 또 전쟁터로 나갑니다 멀쩡한 얼굴로 출근합니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얼굴입니다 손잡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뽀뽀도 진하게 합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열심히 일한다고 합니다 퇴근 시간엔 여지없이 좀 늦을 것 같다고 기별이 옵니다 오늘은 정신 멀쩡할 것이라는 약속도 합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립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립니다 “여그가 워딘지 몰겄어힝.”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곤 감감무소식 핸드폰 재발신을 연신 눌러도 꿀먹은 벙어리입니다 심장이 벌렁벌렁거립니다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살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아파트 앞을 배회합니다 새벽달이 서쪽으로 많이 기울기 시작할 때쯤 택시에서 내리는, 비틀거리는 낯익은 모습이 보입니다 취한 눈에도 각시 모습은 보이는지 두 팔을 벌려 격하게 다가와 끌어안습니다 횡설수설하며 아파트 벽 앞에 서서는 일장 훈시를 하며 볼일을 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바지 앞 지퍼도 올리지 않고 경비실로 향합니다 거수경례를 불량스럽게 한 후 경비아저씨를 끌어안고 와이프 소개를 매번 합니다 우리 집에 가서 한잔하자고 우깁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일장 훈시를 또 한 번 합니다 현관문 앞에서는 “일, 공, 공, 육” 도어 비밀번호를 큰소리로 외치며 엉뚱한 곳만 연신 눌러댑니다 10월 6일은 호주에 유학 가 있는 딸내미 생일날입니다 중학교 때부터 외국 생활하는 딸 생일을 잊지 않겠다고 모든 비밀번호는 1006입니다 옷도 벗지 않고 거실 침대에 쓰러집니다 양말을 벗지 않아서 이불에 미안한지 발은 내놓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의 전쟁도 이렇게 끝나나 봅니다 내일은 또 어떤 전쟁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뷰티라이프> 2016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