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저것

시는 또 다른 나의 분신이다

불량아들 2018. 3. 13. 10:57

시는 또 다른 나의 분신이다

 

나의 문학관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많은 걸 생각하게 됩니다.

어제는 어느 세미나에서 임종 체험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세미나 후 강사와 막걸리를 나누며 지나온 인생에 대해 다시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도 가졌습니다.

강사가 제게 묻더군요. “성공한 인생은 어떤 것이냐고?”

술 때문에 불콰한 얼굴이 된 필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정신적, 물질적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삶을 일군 생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뜬금없이 웬 인생 이야기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삶과 문학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삶과 동떨어진 문학을 영위하는 분들이 더러는 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우리가 그네들의 삶을 잘 못 알고 있거나 오류로 인식하는 데서 기인하지 않을까요?

 

필자는 작디작은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봄이면 신작로 옆에 하늘하늘 피어 있는 코스모스를 보며 등교했고

하교 후에는 외양간의 소를 몰고 앞산으로 소 풀 뜯기기를 하러 갔습니다.

이때 옆구리에 동화책이나 소설, 시집, 통속잡지 하물며 만화책이라도 끼고 갔지요.

소를 산이나 언덕에 풀어놓고 산 어스름에 기대어 보는 책읽기는 행복 그 자체였습니다.

더구나 산기슭, 언덕에 피어있는 꽃이라도 볼라치면 그 행복은 몇 배로 늘었습니다.

진달래꽃을 따다 화전을 부쳐 먹으며 가난한 이웃끼리 나눠먹기도 했지요.

 

여름날이면 개울에서 개구리헤엄을 치며 소일했고 밤이면 수박서리, 참외서리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시골에는 목욕탕이 없어 여름밤이면 온 동네 아줌마, 누나들이 밤에 냇가에서 목욕을 했습니다.

동네 개울가가 공중목욕탕이었던 셈입니다.

개구쟁이 사내 녀석 몇은 냇가로 몰래 숨어들어가 동네 누나들의 옷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울고불고 난리치던 누나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합니다.

훔친 옷은 다시 가져다주었는지 요새 정치인들의 말처럼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가을이 되면 온 동네가 잔치 마당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풍년이었지요.

메뚜기를 찾아 황금빛 들녘을 뒤지기도 했고 밤과 도토리를 주우러 앞산, 뒷산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밤새 바람이 몹시 분 날이면 떨어진 감을 줍기 위해 새벽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허수아비를 보며 인생무상을 잠시 생각하기도 했지요.

 

겨울이면 아랫목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하나뿐인 이불을 가지고 형제자매끼리 줄다리기하다 혼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잠이 들고 새벽에 깨어나기라도 하면 앞산에서 들려오는 소나무가지 부러지는 소리!

간밤에 내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소나무 가지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내는 소리는

꼬맹이들에게 부처님 목탁소리처럼 청아하게 청아하게 다가왔지요.

이런 날이면 동네 청년들은 앞산으로 토끼몰이를 갔지요.

토끼는 잡지 못하고 옷만 잔뜩 후지른 채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지만 말입니다.

 

언제나 저녁 비둘기는 대밭을 날아올라/태양이 저물어가는 서쪽 산꼭대기로 향했다/

저녁노을이 빠알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면/동네 아이들은 소를 몰고 산으로 향했다/

날파리조차 쫓기 싫은 배부른 소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고/

꼬마들은 돌멩이를 강가 저 멀리까지 날렸다/버들강아지로 휘파람을 불어제치기도 했다/

해가 기울어 소를 앞세우고 집에 돌아오면/아버지는 뒤꼍에서 장작을 패고 계셨고/

어머니는 저녁 감자를 가마솥에 삶고 계셨다/멍석 깔린 앞마당엔 저녁상이 놓였고/

외양간의 소는 큰 눈만 껌벅이고 있는데/한 대 얻어맞은 바둑이는 모깃불 옆에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꼬리만 흔들고 있었다/

저녁을 마치면 밤하늘의 별을 보며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다가/하나 둘씩 잠이 들었다/

잠이 들어서도 아이들은 할머니 꿈을 꿨다/그리고 어른이 된 오늘도 꿈을 꾼다. 아련하게 또렷하게

(졸시 전문)

 

시골에서의 초, 중, 고를 마치고 서울의 대학에 들어와서 필자가 느낀 것은 위화감과 소외감이었습니다.

그 소외감은 고등학교 실업계를 들어간 것보다 더 심했습니다.

초등, 중학교에서 어느 정도 공부를 했던 필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한

익산의 국립 전북기계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이 학교의 교훈은 기술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였습니다.

교훈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국립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수업료가 없었고 기숙사에서 생활했습니다.

기숙사에서는 밤 10시가 되면 전체 소등해야 했고 대학에 갈 엄두를 못 내게 했습니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산업체에 취업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국에서 모인 가난한 수재(?)들은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자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놀면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초, 중학교 시절 막연하게 동경했던 글쓰기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이러니입니다.

 

대학 시절, 촌놈들끼리 인문대 잔디밭에서 밤새 막걸리를 마시며 문학에 대해 논했습니다.

그러나 글은 혼자 써야한다는 신념이 강했던 필자는 시를 쓴다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 흔한 문학서클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시를 제일 잘 쓴다는 허영심에 빠졌습니다.

이건청 교수님의 시창작론에서 몇 번의 칭찬을 받고는 더욱 으쓱해졌습니다.

이승훈 교수님의 현대시론을 수강한 것을 계기로 교수님의 민방위 훈련을 대신 받아주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교수님으로부터 몇 권의 시 창작에 도움이 되는 책을 선물받기도 했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며 3학년을 마치고 무언가 이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시를 한 번 검증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교생 실습 가지 전,

한대신문에서 주최하는 한양문학상에 투고를 했습니다.

교생 실습 기간에도 3학년을 맡았던 필자는 술 좋아하시는 3학년 담임선생님과

방과 후에는 학교 앞 술집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를 받았습니다. 설마 했던 한양문학상에서 당선됐다는 소식입니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이맘때만 되면/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문득//

육십만 원이면/황소 한 마리가 아니라/그 크기만큼의 상처를/도려내는 것이 아닌지/

시골의 부모님은/보기도 어려운 고지서를 받아들고/많은 돈에 대견해 하며/

서로의 허리를 쓰다듬기도 하지만/이제 일 년만 기다리면/올림픽복권처럼/

오백 원짜리가 일억 원이 되는/희한한 복권처럼/그런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있는 터이지만/

돈도 백도 없는 서울의 대학생인 나는/쌀밥보다 더 미끈한 시를 꿈꾸지만/

고향보다 더 감칠나는 노래를 꿈꾸지만/그런 노래가 더 굽을 부모님의 허리를 펴게 할 수 있을까?//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이맘때만 되면/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문득

(졸시 수업료전문)

 

지금 생각하면 이때 낙선했어야 합니다.

글쓰기는 혼자해도 된다는 필자의 잘못된 믿음을 고착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심사위원을 맡으셨던 당시 불문과 김광규 교수님을 찾아뵙고 덕담과 함께 술을 한잔 얻어먹고

상금으로 국문과 학우들과 잔디밭에서 날밤을 새워 축하주를 마셨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학교 신문에서 시 부문 당선자 이름으로 국문과 이완근을 게재하자

과 선, 후배들이 우리과에 이완근이라는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 내기했다고 합니다.

만날 술만 마시고 시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았을 것 같은 이완근이 시 부문 당선이라니 믿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시를 끄적거렸습니다.

이렇게 끄적거렸던 시들을 모아 작년 3월에는 <불량아들>이라는 첫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문학광장> 2012년 가을호로 우연히 등단했으니 등단 후 2년만이었습니다

 

시는 불현 듯 다가옵니다.

술을 마시다가, 길을 걷다가, 영화를 보다가, 새벽에 요의를 느껴 눈을 깜박이다가...

 

필자는 모든 예술은 재미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는 더욱 그러합니다.

물론 재미라는 것이 객관적일 순 없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시들을 보면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지난달엔 소설가로 이름이 높지만 시도 잘 쓰는 김도언 작가와

충무로 주막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여기에 대해 집중 토론했습니다.

다 똑같은 방식으로 시를 쓸순 없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앞서서 장황하게 필자의 어린 시절부터 되짚어본 것은 삶과 문학은

떨어트려 생각할 수 없다는 필자의 명제를 부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시골에서 자랐고 농촌의 피를 물려받았기에 그에 걸맞는 문학을 개척하고 길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필자는 믿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질서한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다.’라거나

시를 짓는 것은 앞서 가는 사람의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승훈 교수님의 논지를 필자는 숭배합니다.

주변의 사물들을 다정하게 애무하며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것도 문학인의 자세가 아닌가 묻곤합니다.

 

쓰고 보니 시골쟁이의 넋두리가 되고 말았는데 이것 또한 필자가 넘어서야 할 명제이며

반대로 필자의 개성이 되지 않을까 하는 위안도 갖습니다.

 

시시한 시는/절대/없다//시는/산사의 언어//스님의 목탁소리처럼/

고요하게/어린 아이의 뜀박질처럼/경쾌하게//총총총//총소리 울려 퍼진다/

악어는 꺼이 꺼이 운다/새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총소리를 이겨내는 저 장단음//혼탁의 시대/시는/부활하고/또 부활한다//

산사의 목탁소리처럼/어린 아이의 뜀박질처럼

(졸시 전문)

 

<문학광장> 제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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