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 즐거움 14

전화-박상천-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08) 전화 박상천(1955~ ) 아침이면 전화기를 들여다보며, 그녀의 이름이 몇 번쯤 찍혔는지에 따라 전날 밤 나의 술 취한 정도를 가늠하곤 했다. 술에 취해 어딘가에서 졸고 있을지 모를 나를 위해 응답 없는 전화를 계속 걸어대던 아내. 이젠 전화기에 그의 이름이 뜨지 않은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난 아직 그의 번호를 지우지 못한다. 번호를 지운다고 기억까지 지울 수 없을 바엔 내게 관대했던 미소와 아직 생생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고맙고 미안했던 그녀에게 응답 없는 전화라도 걸고 싶기 때문이다. 그곳, 아내의 전화기엔 나의 이름이 뜨고 있을까?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08번째 시는 박상천 시인의 “전화”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랑 속에서 삶을 영위합니다..

코뚜레-신휘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2) 코뚜레 신휘(1970~ ) 한 일 년 쇠죽을 잘 끓여 먹이고 나면 아버지는 송아지의 콧살을 뚫어 코뚜레를 꿰었다. 대나무나 대추나무를 깎아 어린 소의 콧구멍에 구멍을 낸 뒤 미리 준비해둔 노간주나무로 바꿔 꿰는 작업이었다. 코뚜레는 단단했고, 어린 소의 코에선 며칠씩이나 선홍빛 피가 흘러내렸다. 소는 이내 아픈 코에 굳은살이 박였는지 오래지 않아 한결 유순하고 의젓한 소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놈을 몇 달 더 키운 뒤 일소로 밭에 나가 부리거나 제값을 받고 먼 시장에 내어다 파는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사납고 무서웠던지, 오십이 다 된 나는 지금까지 코뚜레를 꿰지 못한 어린 소로 살고 있다. 누가 밖에 데려다 일을 시켜도 큰일을 할 자신이 없었거니..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왕은범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1)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왕은범(1959~ ) 가만 하늘을 보면 별처럼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 앞에 앉으면 다정스레 쌈을 싸서 바알간 입에 넣어주고 싶은 사람 안개 자욱한 호숫가 카페에 앉아 그윽한 눈 이야기 나눌 그런 사람 눈이 하얗게 하얗게 벚꽃처럼 내리기 시작했을 때 전화기를 꺼내 “눈이 와”라고 속삭이고 싶은 사람 오래 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는 순백의 구절초 같은 사람 볕 좋은 창가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구름처럼 몽글몽글 그려지는 사람 나는 진정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보랏빛 그리움 같은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1번째 시는 왕은범 시인의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입니다. 의미 있게 삶을 사..

사과없어요-김이듬-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0) 사과없어요 김이듬(1969~ ) ​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어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 달라고 할까, 아 어쩐다, 그러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선짜장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쫓겨날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 커녕 몽땅 뒤집어쓴 적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제거되고 추방된 나로서는, 아아 어쩐다, ..

게르니카-이지엽-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79) 게르니카1 이지엽(1958~ ) ​ 24대의 전투 비행기가 5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울부짖는 말과 멍한 황소, 죽은 아이를 안고 절규하는 어머니, 잘린 팔과 부러진 칼, 불에 타고, 쓰러지고, 겁에 질린 눈, 분할되고 왜곡된 흑백 톤의 음산함, 출구가 너무 좁았다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의 장날이었다 *게르니카:1937년 피카소의 그림(캔버스에 유채,776x349cm)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79번째 시는 이지엽 시인의 “게르니카1”입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7월 스페인의 두 번째 공화국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약 3년에 걸쳐 일어난 전쟁입니다. 공화정을 지지하는 공화파와 입헌군주제를 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