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저수지에 빠진 의자-유종인-

불량아들 2019. 5. 21. 12:03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71)


저수지에 빠진 의자

유종인(1968~ )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속에 든 날부터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

물은 누워서 흐르는 게 아니라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서서 흐르고 있었다

 

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

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

슬몃 건너편 산 그림자를 앉히기 시작했다

 

제 울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71번째 시는 유종인 시인의 저수지에 빠진 의자입니다.

 

하느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나름대로의 역할을 맡겼다는 것은 맞는 말일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돌멩이는 돌멩이대로 물은 물대로 그 역할을 부여했겠지요. 그 역할에 충실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은 피조물 의지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세상이 재미있는 건 창조자(또는 인간)가 처음 의도했던 대로 피조물이 그 역할을 다하지 않거나 그 역할을 뒤집어서 행했을 때입니다. 계산대로만 사는 인생이라면, 처음 의도했던 대로만 사는 삶이라면 얼마나 따분할까요. 삶의 진정한 재미가 낯설게 보기에 있다면 낯설게 사는방법 또한 유익한 생활법이 아닐까요?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는 어쩌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피조물입니다. 겨울철 부엌 아궁이에서 방바닥을 따뜻하게 지피거나 썰매를 타다 지친 시골아이들의 장작불이 되어 언 손을 녹여준다면 그나마 그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 의자가 생이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이었지만 스스로 다리를 부러뜨려서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요? 낡고 다리까지 부러진 의자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물속에 든 날또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 세계는 그전의 삶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그곳에서는 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상상할 수도 없었던 세계, “서서 흐르고 있거나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드는 세상이 펼쳐집니다.

이는 의자가 피조물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창조해낸 창조자로 대체됩니다. 그렇다고 무든 피조물이 창조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부단한 자기반성과 타자의 존재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수반되어야 가능하겠지요.

 

오늘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반대쪽의 그림자에도 따뜻한 눈빛을 가져야 함을 저수지에 빠진 의자는 가르쳐줍니다. 스스로의 삶에 다른 시선과 의지를 보여줌으로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수 있다는 것, 이 시의 매력입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1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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