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꽃다지-서대선-

불량아들 2019. 4. 17. 16:15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70)



꽃다지

서대선(1949~ )

 

눈 내린 새벽

 

남의 집 살러가는

열두 살 계집아이

등 뒤로

 

눈 속에 묻히는

작은 발자국

 

멀리서 대문 닫아 거는 소리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70번째 시는 서대선 시인의 꽃다지입니다.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라고 말한 필립 시드니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잘 쓴 한 편의 시는 책 한 권이나 영화 한 편과 맞먹는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서대선 시인의 꽃다지도 그런 시 중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때는 눈 내린 새벽한겨울입니다. 온 동네를 집어삼킬 듯이 수북이 쌓인 눈은 평화로움보다는 울음을 삼킨, 적막의 표상입니다. 신이 난 동네 개 몇 마리는 눈 덮인 배추밭을 뛰어다닐 만도 한데 그런 징후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남의 집 살러가는/ 열두 살짜리 계집아이가 보일뿐입니다. 열두 살짜리 계집아이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집안이 얼마나 빈곤하길래 한창 뛰어놀 열두 살에 남의 집으로 몸 동냥 갈까요? 식모로 가는 걸까요, 하녀로 가는 걸까요? 그 집은 식구가 몇이나 될까요? 새로운 집의 주인은 얼마나 후덕할까요? 질문과 의문은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열두 살짜리는 슬퍼할 시간도 없이 지금 집을 떠나야 하고 눈은 오살 나게 많이도 내렸고, 또 내리고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눈 밟히는 소리마저 죄스러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내딛을 뿐입니다. 그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났는지 안 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눈은 작은 발자국 위로 내리고 또 내려서 흔적을 지우고자 애를 씁니다. 애를 쓰고 있는 건 눈만이 아닌 듯합니다. ‘잘 가거라’, ‘또 만나자는 소리조차 못하고 소녀의 부모는 울음을 삼키며 멀리서 대문 닫아 거는행동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얼마나 많은 울음을 쏟아냈을까요. 하염없이 달려 나가 열두 살짜리 딸내미를 붙잡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독한 가난도 저주했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딸내미 모습이 보이지 않게, 그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대문을 닫아 거는 행동밖에 할 수 없다는 것. 평화로움의 상징인 쌓인 눈은 우리의 애절한 마음의 두께만큼 두텁고 두텁습니다.

 

짧지만 울림이 강한 시, 한편의 영화로도 완성하지 못할 이야기를 머금고 있는 시. 오늘은 먹먹한 가슴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하는 유쾌한 경험을 이 시를 통해 느끼셨으리라 헤아려봅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1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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