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72)
꽃밭
소강석(1962~ )
아주 없어진 지 오래
뜨락이라도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꽃씨를 뿌려도
싹틀 수도 없는 회색빛 바닥뿐
그래도 아련히 떠오르는
누님의 들국화 향기.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72번째 시는 소강석 시인의 “꽃밭”입니다.
소싯적 다녔던 초등학교를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들렸던 적이 있습니다. 높기만 했던 운동장 담장은 허리춤 조금 위까지만 올라왔고, 거대하기만 했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어른 키보다 조금 클 정도였습니다. 소인국에 온 기분이랄까요. 강당이며 운동장, 초칠을 해 반들반들하게 했던 교실 바닥 등등 장소, 장소마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한동안 멍한 시선으로 입가에 미소만 지었습니다. 한 편의 영화가 화들짝 지나가고 가슴은 쿵쾅거렸습니다. 그 추억, 다시 떠올려도 그립고 그립습니다.
지금 시인은 옛적에 살았던 고향집을 찾아갔나 봅니다. 고향집은 많은 추억과 그리움이 쌓인 곳! 어서 가서 그 시절을 반추해보고 싶었겠지요. 그 떨리는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옵니다. 오래된 집이기에 형체가 온전히 남아있기를 기대하진 않지만 “뜨락이라도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은 간절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고향집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고향집의 넓었던 부지는 재개발되었거나 아파트라도 들어섰겠지요. 마당 한 켠 화단을 가꾸며 행복했던 추억은 온데간데 없어져버렸습니다. “꽃씨를 뿌려도/ 싹틀 수 없는 회색빛 바닥”만이 시인의 마음을 심란하게 합니다.
옛적, 온 가족이 화단을 가꾸며 얼마나 행복했던가요. 꽃씨를 파종하며 서로에게 물을 뿌리기도 하고, 흙 묻은 손가락으로 누이의 얼굴에 장난도 쳤겠지요. 부모님은 밉지 않게 나무라며 ‘너도 한번 맛 좀 봐라’ 똑같이 응징해주었을 것이고...... 외양간의 소는 구유 안의 여물을 되새김질하고 있었을 것이고,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피웠겠지요. 어미닭은 병아리들을 일렬로 데리고 앞마당, 뒷마당을 활보했을 테지요.
추억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현실은 “회색빛 바닥뿐”, 그렇다고 여기서 멈춰서면 안 됩니다. 시인은 상상을 먹고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사는 동물. 화단에 핀 꽃 중에서도 누님이 유난히 좋아했던 “들국화 향기”를 시멘트 바닥에서 읽습니다. 지금 시인 앞에 보여지는 것은 시멘트 바닥이 아니라 유년기의 추억이 깃든 화단인 것이지요. 아름다운 추억은 이처럼 질기고도 영원한 법. 세상은 변해도 사람의 마음은 빼앗아가지 못 하는 법.
10층을 쌓을 수 있는 재료를 압축하고 압축해서 1층의 튼실한 집만을 지을 수 있는 시작법. 좋은 시(?)는 이렇게 여운이 길고 감흥에 오래 오래 머물게 합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19년 7월호, 창간 20주년 기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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