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아버지의 제사

불량아들 2007. 5. 14. 09:31

아버지에 대한 추억

세상에는 많은 아버지가 존재합니다.
좋은 추억이건 나쁜 추억이건 아버지가 자식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합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침묵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걸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내가 어릴 적부터 그랬습니다.
화가 나실 일이 있을 때도, 좋은 일이 있을 때도
침묵으로 받아 넘기셨습니다.
텔레비전에 하춘화가 나와서 노래를 부를 때,
코메디언 배삼룡 씨가 익살을 떨 때도
빙그시 웃기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평생 주고만 가셨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빚보증으로 어렵게 마련한 수족과도 같은 논을
날려버릴 뻔한 일도 있었고, 남에게 꾸어준 돈은 잊어버리기
다반사였습니다.
남의 집 궂은 일에는 발벗고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뒷처리를 하느라 애를 많이도 태우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버지는 그러나 막무가내였습니다.
시골 이웃들이 어렵게 부탁하는데
어떻게 들어주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시골 친구들이 우리 사랑방에 떼거지로 모여 놀던
추석날 밤이었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놀 때도 무섭게(?) 놉니다.
삼십여 명의 혈기왕성한 청춘들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방 뜨며 고래고래 노니다가 그만 일을 내고 말았습니다.
명절이 다가온다고 며칠 전에 방구들을 새로 놓고
벽지까지 새로 발랐는데, 방구들이 청춘들의 난리부르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풀석 주저앉아버린 것입니다.
사랑방 모서리에 놓인 콩나물 시루는 반절은 깨져 있고
어느 청춘이 버린 담배 꽁초에 콩나물은 까맣게 썩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이 처참한 광경을 보시고도
아무 말씀없이 황토흙을 개다가 방구들을 다시 놓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내자식은 친구들을 두루 사귀어야 한다고
아침 밥상에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못난 자식은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시골에서 애를 두엇씩 둔,
그 당시 친구들끼리 모이면 그때 얘기를 하며 추억에 젖기도 합니다.

학교가 늦게 파하는 하교길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이웃 마을 누나들은 꼭 우리집으로 오곤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어스름한 저녁길을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몇몇은 업기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귀신이 나온다는 산골길을 돌아 이웃 마을 집집을 돌며
아이들을 안전하게 바래다 주셨습니다.
어릴 적 철부지인 나는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때론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과묵하신 아버지는 그러나 장난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한 마디씩 하시는 농담은 동네 사람들을 박장대소하게 하셨습니다.
일을 하시다가도 술을 드실라시면
근방의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술 한잔도 혼자 드시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이제 하늘나라로 소풍을 가셨습니다.
아버지 하늘나라 소풍 때 많은 분들이 오셔서
소풍길을 외롭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늘나라 소풍길 때 배웅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드립니다.

아버지 살아 생전 많은 정을 베푸셨고,
그 정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리워합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정을 베풀지만 마시고
많은 정을 받으시면서 영면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지난 토요일은 아버지의 기일이었습니다.

2003년 4월 27일(음력 3월 26일)의 일이니 벌써 4년이나 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는 아주 특별하셨습니다.

4년 전에 쓴 글을 다시 한 번 읽으며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되새겨 봅니다.

 

토요일날 고향에 내려가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아버지 산소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아버지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면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조환을 받았다고 상기하십니다.

 

아직도 동네 사람들은 물론 면, 군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계신 아버지,

하늘나라에서는 베푸신 만큼 많은 사랑 받으시면서 편안하옵기를

찬연한 봄날에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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