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라이프 칼럼

정감 가는 낱말 몇 개

불량아들 2010. 8. 23. 08:05

                  정감 가는 낱말 몇 개

 

<고샅길> 시골 고샅길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풍경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던 그 시절에 고샅길은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터였지요.

자랑이 있었고 딱지치기, 기차놀이, 공차기, 자치기, 고무줄놀이, 닭싸움 등등.

온 동네 애들을 한 부락민으로 만드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좁은 고샅길을 달구지라도 지나갈라치면 꼬마들의 원성이 대단했습니다.

고샅길 위에 찍힌 선명한 마차 자국은 아직도 유년의 머릿속에서 머물고 있네요.

 

<잉태> 이 단어만큼 우주까지를 지배하는 낱말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영롱한 보석 안에서 빛나는 물방울, 이슬방울들, 기분 좋은 신비함을 간직한 이런 낱말도 있나니!

하느님은 온 세계를 잉태하셨고 옆집 개는 강아지를 잉태하였고

우리 머릿속에는 좋은 생각들만 잉태하리니...

 

<여울목> 냇가의 물이 바위나 돌멩이를 비켜가기 위해 잠시 맴돌다 가는 곳이 여울목입니다.

땀 흘리며 달려가고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잠시 여기 삶의 여울목에서 쉬었다 가시지요.

 

<툇마루> 툇마루에는 한 가족의 사랑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 누나, 동생들과 어우러지는 훈훈한 가족애가 있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찐 옥수수를 나눠 먹으며 듣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무섭고 신나고 눈물 나게 했지요.

 

<설강> 설강은 부엌에 있는, 요즘으로 치자면 찬장에 다름 아닙니다.

소쿠리가 있었고 찐빵이 있었고 누룽지가 있었고,

그래서 쥐들이 많이도 드나들던 통로가 되기도 했지요.

키가 작았던 개구쟁이들은 설강에 있는 음식을 몰래 먹으려다 와장창 뒤집어 놓기 일쑤였습니다.

 

<논두렁 밭이랑> 논두렁에는 질펀한 삶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논두렁이 남정네들의 이야기라면 밭이랑은 수줍은 아낙들의 이야기 장소였지요.

일을 하다가 새참 시간을 이용하여 엉덩이 붙이고 앉아 늘어놓는 음담패설은

세상 그 어떤 이야기보다 흥미진진했지요.

 

<산그림자> 햇볕이 쨍쨍한 여름 오후에 동네 꼬마들은 소를 몰고 앞산으로 나갔지요.

소 풀 뜯기기를 위해서입니다.

삐비도 뽑아먹고 오도개를 따 먹기도 하다가

산 그림자가 서서히 그 키를 늘리기 시작하면 소를 앞세우고 동네로 돌아옵니다.

산 그림자 마냥 쑥쑥 크는 키를 상상하며...

 

<구유> 소 먹이통이 구유입니다. 우리 시골에서는 구수라고도 했지요.

통나무에 깊은 홈을 파서 만들었는데,

소죽을 쑤워 주면 누렁이는 큰 눈을 껌벅이며 그렇게 맛있게도 먹었습니다.

쌀뜨물에 무가 간간이 들어간 물을 구유통에 부어주면 참말로 신나게도 먹었드랬습니다.

 

<솔바람소리> 솔바람소리에는 천 년의 시간이 한꺼번에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원시의 소리에서부터 문명의 소리까지...

그 아득함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에 경주 불국사에서 듣던 솔바람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명하게 다가오네요.

 

이 밖에도 시나브로, 해찰, 제사단자, 부뚜막, 칙간, 모정, 외양간, 토담, 장광, 산내끼 등등

생각하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낱말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기자가 뜬금없이 이런 낱말들은 되뇌는 건 더운 여름날 열 받지 마시고 건강들 하시라고,

열 받은 머리에 영양제 대신 드리는 선물이라나 뭐라나...^*^

 

                                                       이완근(편집국장)alps0202@hanmail.net

 

여름 매미

 

이른 새벽

누군가를 위해 시를 읽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밤새 마신

털털한 막걸리 목소리로

시를 읽는다는 것

목청을 가다듬고 시를 외운다는 것

 

매미는 자지러지게도 울어쌓는다

저 매미도

행복한 일일 것이다

 

<뷰티라이프>201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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