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토요일 오후-오탁번-

불량아들 2013. 9. 30. 10:41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4)

 

토요일 오후

                                    -오탁번(1943~ )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을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야?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네 번째 시는 오탁번 시인의 토요일 오후입니다.

토요일 오후의 행복을 아시나요?

지금은 주 5일제가 정착되었으니까 반공일로 지칭되던 토요일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심정은 이제 아스라한 추억거리가 되었지요.

 

필자는 무릇 시와 소설, 연극, 영화 등등 모든 예술은 재미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재미만 추구해서는 예술이 될 수 없겠지만 재미는 예술을 이루는 구성 요소 중

주요 목록에 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이 시는 재미있습니다.

소시민의 생활 속 행복을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은 全 前대통령 일가의 추징금에 대한 기사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장남 750억, 차남 500억, 삼남 200억, 딸이 40억, 사돈이 100억씩을 분담해서

1672억에 달하는 추징금을 완납한다는 기사였습니다.

아들 둘은 차례대로 검찰에 불려나간다더군요.

그들은 서민들이 보기에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부풀렸을지는 몰라도 토요일 오후의 행복을

만들지는 못 했다는 생각을 이 시를 읽으며 다시 한 번 곱씹습니다.

 

행복은 일주일의 고된 일을 마친 토요일 오후, 행운목을 보면서,

알맞게 재미난 영화를 보면서, 한강 시민공원으로 가족 나들이를 하면서,

딸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면서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시대의 서민들이 살아가는 것은 인류 평화를 위해서도 아니고

지구에서 기근과 배고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저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고 싶은 욕심뿐입니다.

 

구슬과 불알을 구별 못 했던 순진무구한 딸이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자라나는 게

안타깝지만 세상에 딱 맞게자라주는 게 또 얼마나 대견하던가요.

 

오늘은 토요일 오후는 아닐망정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내나 남편, 아들이나 딸들을

불러 모아 가족의 행복을 느껴보시는 게 어떨런지요?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2013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