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김광규-

불량아들 2013. 12. 12. 11:21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6)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1941~ )

 

4·19가 나던 해 세밑 희망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여섯 번째 시는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노라면 사랑이란 것을 하지요.

그것은 이성에 대한 사랑이 될 수 있고 이념, 또는 사상에 대한,

가족이나 사회에 대한 사랑도 될 수 있겠습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대학시절 김광규 시인님을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과는 달랐지만 필자가 다니던 대학의 독문과에서 김광규 시인은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습니다.

매년 5월이면 학교에서 문학상을 발표했는데 시 부문에서 필자가 수상했던 그때

시 부문 심사위원이 김광규 교수님이셨습니다.

수상 기념 인사차 방문했는데 따뜻하게 맞아주셨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젊은 예비 시인(?)에 대한 기대로 덕담을 해주실 적에 정이 뚝뚝 흘러넘쳤던,

그래서 감동했고 교내 잔디밭에서 막걸리에 대취했던 기억도 희미하게 생각납니다.

 

민주주의가 완성(?)되기 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울분과 격정적 토론으로 밤을 하얗게 새웠던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소위 철이 들면서 그 열정과 정의감은 날로 퇴색해 갑니다.

가장이라는 굴레가 모든 것을 용서해준다는 듯이 시나브로 잊어가지요.

이런 모든 게 누굴 탓할 것은 못 되지만 어느 날 문득 내가 세상을 제대로 살고 있나하는

생각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지요.

 

머리 아프지요, 산다는 게.... 어떻게 해야 제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중년이 된다는 건 세월만 축냈다는 것은 아닐진대요.

그 에너지가 오늘날의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힘이 되고 있는 건대요.

그러니 자, 오늘은 옛 사랑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허름한 공간을 찾아

스스로 대작해보지 않으시렵니까?

옛 열정이 온몸을 휘감아 올지도 또 모르잖아요.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 2013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