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사평역에서-곽재구-

불량아들 2014. 2. 6. 10:56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

 

사평역에서

곽재구(1954~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여덟 번째 시는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입니다.

다들 맛있는 풍경을 잘 구경하셨는지요?

시인은 언어를 빚는 이들이 아니라 마음속에, 마음속 그림을 그려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이 시를 읽으며 다시 곱씹습니다.

 

우리는 많은 의문들을 품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사후 세계는 존재하는 것일까? 등등.

이런 의문들을 사유와 논리를 통하여 풀어가는 사람들이 철학자라면

시인들은 논리를 넘어서서 상징이라든지 은유를 통하여 삶의 본질을 밝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 또한 그렇습니다.

표면상으로는 눈 오는 시골 간이역을 묘사하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많은 의문들과 그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삶에 정답이란 없지요.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들을 잘 알지요.

정답 없는 삶이지만 희망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

그래서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

삶에 대한 희망을 이어가지요.

 

거개의 좋은 시들은 그 어떤 풍경화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눈이 하얗게 쌓인 시골 간이역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집니다.

내리는 눈 속에서 톱밥 난로의 불빛은 빨갛게 빛납니다.

침묵하고 있지만 마음속 내밀한 생각들은 눈빛으로 읽지요.

좀처럼 오지 않는 막차에 안절부절 할 필요는 없습니다.

눈꽃의 화음을 귀로 적실 수 있는 또 다른 존재의 이유, 기쁨의 순간이 있으니까요.

 

잘 그려진 한 편의 시를 감상하는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그런 시를 준 시인에게 축복 가득 하리라.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 M] 2014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