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엄마 생각-기형도-

불량아들 2014. 8. 14. 11:52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4)

 

엄마 생각

-기형도(1960~1989)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열네 번째 시는 기형도 시인의 엄마 생각입니다.

기형도 시인은 나이 삼십을 몽땅 채우지 못하고 요절한 천재 시인에 속합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기형도 시인을 기억하고 있지요.

 

며칠 전, 인사동 어느 술자리에서 얼큰하게 술이 올라 이 시를 읽던

후배 시인의 모습이 아름답게 다시 한 번 떠오릅니다.

 

기형도 시인이 아니더라도 우리 세대를 경험한 이들은

이 시의 주인공이 나 자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나물을 이고, 아버지는 나무지게를 지고

삼십 리나 되는 장터로 새벽같이 출발하셨지요.

꿈속에서 아련하게 차비를 서두르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은 삶의 고단함보다는

저녁이면 맛있는 과자를 먹을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하루를 맞이했지요.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동네 꼬마들은

산 고개를 돌아 장에 간 엄마, 아빠 마중을 나갔지요.

해가 떨어져도 오지 않으시는 엄마, 아빠.

해가 더 지면 산에서는 여우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아버지 혼자 얼큰하게 취해서 돌아오시기도 하고

엄마는 팔다 남은 채소를 꽁꽁 묶어서 힘없이 걸어오기도 했죠.

어느 때는 환한 웃음으로 우리에게 군것질거리는 듬뿍 안겨주기도 했던 그때 그 시절.

 

그 시절을 회상하니 떠오르는 생각 또 하나.

학교가 파하고 보자기 책보를 펄렁거리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

소리쳐 봐도 툇마루에는 햇볕만 쨍쨍 울 엄마 보이지 않네.

이때 복받쳐 오르는 설움.

눈치 없는 멍멍이만 뺨에 흐르는 눈물을 핥아대고....

 

다시 기형도 시인 생각.

기형도 시인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1년 유고시집으로 나온 <입 속의 검은 잎>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요.

이 시는 우리 옛 정서를 잘 표현한 시인의 수작으로

우리 마음속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반추하게 하네요.


시인은 가도 그 시는 영원한 법!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201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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