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고운기-

불량아들 2014. 8. 21. 13:31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5)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고운기(1961~ ) 


 1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오고 

 열 몇 마리씩 떼를 지어 산마을로 들어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사립문 밖에 나와 산과 구름이 겹한 

 새 날아가는 쪽 하늘 바라보다 

 밀물 드는 모랫벌 우리가 열심히 쌓아두었던 

 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들을 바라보면 

 낮의 햇볕 아래 대역사를 벌이던 조무래기들 

 다 즈이 집들 찾아들어가 매운 솔가지 불을 피우고 

 밥 짓고 국 나르고 밤이 오면 잠들어야 하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분주히 하루를 정리하고들 있었다 

 그러면 물은 먼 바다에서 출발하여 

 이 마을의 집 앞까지 밀려와 모래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부터 잠재웠다 

 열심히 쌓던 모든 것을 놓아두고 

 각자의 집으로 찾아들어간 조무래기들의 무심함만큼이나 

 물은 사납거나 거세지 않게 

 천천히 고스란히 잠재우고 있었다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와 

 산마을 어디로 사라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2 


 이 도시에 밀물처럼 몰려오는 어둠 

 먼 시가지가 보이는 언덕길 버스 종점에 내려 

 돌아올 버스 토큰 하나 남았던 허전함처럼 

 모두 쓰고 버리고 힘들여 쌓아놓고 오는 밤 

 불을 키우고 어둠을 밝혀 

 한낮의 분주함도 이으려지만 

 먼 옛마을에 찾아와 호롱불 몇 개로 정체로 밝히던 어둠이여 

 오늘 인공의 빛을 찾아오는 밀물이여 

 이미 어린아이 적처럼 

 만들었던 것들과 무심히 결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깊은 잠을 주고 또 평평히 

 세상의 물상들 내려앉히는 

 대지의 호흡이여  


 어느 땐가 밤이 깊어져 

 물은 떠나온 제 땅으로 돌아가고 

 백지처럼 정돈된 모랫벌에 아침이 오면 

 이루었으나 아무것 이룬 것 없는 흔적 위에 

 조무래기들 다시 모여들었더니 

 물이 들어왔다 나간 이 도시의 고요함을 딛고 

 내가 간다 

 살아왔던 일일랑 잊을 만하고 

 새 벌판은 끝이 없어 

 또 쌓아야 모습은 못날 뿐이지만 

 일이 끝나 날이 저물면 

 가슴에 벅차도록 몰려오는 밀물은 

 산이 되고 밭이 되고 

 집과 자동차와 친구가 되고 

 정승이 되고 나라가 되고 

 희망도 사랑도

 되었을 것을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열다섯 번째 시는

고운기 시인의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입니다.


신선한 리얼리즘을 느끼게 해주는 이 시는 고운기 시인이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필자는 그 해에 고운기 시인이 다니던 대학에 입학했지요.

동문이 되었던 셈이지요.

 

전북 완주가 고향이었던 필자는 같은 대학, 같은 과 고향도

전남 보성 시골이었던 고운기 시인에게 남다른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시는 시골에서 유년을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가슴속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겠어요.

고백하건데 이 시를 읽고 시를 써야겠다는 의욕이 더 생겼습니다.

그러나 시는 혼자 쓰는 것이라는 편협한 사고에 경도되어 있던 필자는

그 흔한 문학회 활동 하나 하지 않고,

시 쓰는 것 자체를 학우들에게조차 말하지 않았었습니다.


막걸리와 기행으로 시간을 축내던 시간에도 고운기 시인의 행적에는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만나본다거나 연락을 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햇습니다.

고운기 시인이 이미 우리 과의 우상이었고 내성적인 성격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졸업하고 정훈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고운기 선배를 삼각지 육군본부 근처

선술집에서 우연히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어찌나 쑥스럽고 기쁘던지요.


사람의 인연이란 묘한 것.

느지막이 첫시집을 내면서 해설을 부탁할 분을 찾는데

퍼뜩 떠오른 사람이 고운기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연락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런 부탁하기가 영 쑥스러웠죠.

다행히 아는 후배 시인의 주선으로 머뭇머뭇 전화했는데 흔쾌히 승낙해주시는 겁니다.

그 기쁨이라니...


고운기 시인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마침 일본에 출장이 있는데도 기한을 맞춰주기 위해

제 시집 원고를 일본까지 들고 갔다는군요.

더불어 시집이 나오고 출판기념회에서는 축사까지 해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출판기념회는 성황을 이룰 수 있었고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던

몇 여성분은 고운기 시인과 막걸리 자리 잡으라고 아직도 성화입니다.

멋진 외모, 세련된 말솜씨에 반했다고 말입니다.


얘기가 많이 빗나갔습니다만 고운기 시인의 시에 토를 단다는 것이

외람될 것 같아서 개인적인 친분을 주절주절해봤습니다.

이름마냥 고운 심성과 멋을 아는 고운기 시인의 이 시,

정말 마음속에 진한 여운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고운기 시인과 비 오는 날 막걸리 한 잔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비 오거들랑 합석하고 싶으신 분들 연락하시기요.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201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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