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백석-

불량아들 2014. 10. 28. 11:09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7)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1912~1996)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나는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내가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열일곱 번째 시는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입니다.

좋은 시는 머릿속에 그림을 떠오르게 하며, 광활한 바다 속의

싱싱한 새우같이 우리의 심장을 마구 뛰게 합니다.

오랜만에 이 시를 읽으며 가슴 설레는 것도 계절 탓만은 아니겠지요?

 

김소월의 학교 후배이자 소위 얼짱 시인으로 통하는

백석 시인의 고향은 평북 정주입니다.

한 때 고등학교 교사이기도 했던 그는 20대 때

기생이었던 김영한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됩니다. 

이 시에 나오는 나타샤가 김영한인데 시인은 그녀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또 그렇게 불렀습니다.

자야는 노래는 물론이고 전통춤과 글에도 능한 지적이며 아름다운 기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백석 시인 집안의 반대로 무산됩니다.

기생이라는 신분이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둘은 열렬히 사랑했지만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때는 일제 강점기, 시인은 징병을 피해 산속 광산에 은신을 했으며

20대 후반이 되어서는 만주로 건너갑니다.

이때 만주에서 자야를 그리며 쓴 시가 이 시입니다.

 

자야가 돌아오기만을 고대하며, 또한 그런 열망을 담아 마치 두 사람이

깊은 산속 마가리(오막살이) 생활하는 듯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라고 강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사랑하는 이와 깊은 산골에서 오붓이 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은 그래서 더 애절합니다.

 

백석 시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야는 성북동에서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다가

후에 법정스님께 대원각을 시주합니다.

당시 가치로 1,000억 원 상당이었다고 합니다.

법정스님은 시주 받은 요정을 근간으로 ‘길상사’를 세웁니다. 

 

해방 후 백석 시인은 고향인 정주에 자리 잡았고 자야는 서울에 있다가

남과 북으로 갈려 그 후로 둘은 영원히 만나지 못합니다.

자야는 백석을 그리며 일평생을 살았는데

백석의 생일날에는 하루 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합니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올 겨울엔 눈이 많이 올 것 같습니다.

아니 자야를 그리는 백석의 마음이 식지 않는 한 매년 눈은 푹푹 내리겠지요.

어서 눈이 내려 백석을 닮은 우리들의 사랑도 푹푹 쌓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늘은 하릴없이 해봅니다.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 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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