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이가자 편-

불량아들 2017. 2. 24. 12:50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7

 

50여 년간 미용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이가자 대표

 

<이완근이 만난 미용계를 이끄는 사람들>이란 타이틀로 매달 우리 미용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미용인 한 분씩을 집중 인터뷰합니다. 기존의 미용인께는 성공에 대한 성취감을, 미용을 배우고자 하는 꿈나무들에게는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번호에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겠다는 소박한 일념으로 50여 년간 미용의 길을 걸어온 이가자헤어비스의 이가자 대표를 싣습니다.

                     <이완근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alps0202@hanmail.net>

 

 

이가자헤어비스를 이끌고 있는 이가자 대표와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지금도 해외와 전국을 오가며 미용실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위가 한풀 꺾인 2월 어느 날, 실로 오랜만에 이가자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이완근 이가자 대표님의 이야기는 많은 미용인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1942년생이면 올해 75세신데 어릴 적은 어땠나요.                                                         

이가자 저는 어린 시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말이 없는 조용한 아이였습니다. 44녀 중 5번째로 태어났으니 어떤 존재감이 있었겠어요? 이런 저에게 존재감을 찾아주는 계기가 된 사건이 6.25였습니다. 6.25가 일어날 당시 9살이었던 저는 피난처에서 깨진 도자기 그릇 조각들을 주워 깨끗이 닦고 색깔, 모양 별로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제가 수집한 물건들을 보고 크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 물건들이 사실은 도자기 그릇이 아니라 피난길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요강 조각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 조각들이 전혀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조금만 공들여서 닦아주면, 세상에서 빛나는 아름다운 물건들이 될 텐데라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가꾸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저의 열망은 이때부터였던 거 같습니다.

(서울에서 아버지 이태원, 어머니 김금순 씨와의 슬하에 5번째로 태어난 이가자 대표는 9살이 되던 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용인으로 피난길에 오른다. 첩첩산중인 그곳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남다른 감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완근 어떻게 미용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이가자 어느 날 어머니께서 그간 모은 돈으로 미용실 하나를 얻으셨고, 저는 미용 자격증이 없던 어머니를 위해 미용사 면허증을 취득하였습니다. 이후 미용 보조로 어머니의 미용실을 돕다 결혼을 했고, 평범한 주부로 살림만 하다 보니 무미건조하게 지나가는 일상이 왠지 내가 사는 삶 같지 않고 낯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열정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을 찾고 싶어, 남편이 출장 중인 틈을 타 시어머니께만 허락을 구하고 6개월 된 아들과 유모를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결혼 전 취득한 미용사 면허증만 믿고 호기 좋게 미용실을 돌아다니며 무작정 구직 활등을 시작했지요. 그렇지만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아이까지 업고 서울 시내에서 미용실에 취직하겠다고 찾아다니는 저에게 호의보다는 문전박대 하는 곳이 더 많았습니다. 끝내 저를 써주겠다는 곳을 찾지 못했고 결국, 용산 청파동에 조그만 미용실을 50만원에 인수해 전문 미용사를 두고 견습을 했습니다. 묵묵히 하다 보니 미용 기술을 연마하는 재미에 3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고, 그렇게 저는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이완근 일본으로 미용 유학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가자 청파동 미용실에서 원장 겸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보니 전문적으로 미용을 더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그곳에서 체계적인 미용 기술뿐만 아니라 경영에 대해 배웠는데, 이때의 배움이 저에게는 크게 와 닿아 이후에도 꾸준하게 일본을 방문하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유학 후 자신감이 붙은 저는 1972년 서교동에 위치한 레이디스 타운에 제 이름 석 자를 넣은 이가자 미용실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경영을 시작했습니다. 도쿄에서 배운 경영철학을 통해 구습적인 것을 타파한 획기적인 서비스를 도입해 직원들의 호칭부터 ‘~선생님‘~으로 바꾸고, 고급 미용실 전략을 내세우며 이가자 미용실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게 됩니다. 이후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해 외국 브랜드가 물밀 듯이 들어와 국내 시장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후배와 제자들을 독립시켜 이가자라는 브랜드를 달아주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국내 최초 프랜차이즈 미용 브랜드를 만들어 회사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완근 그 당시에 프랜차이즈를 생각하신 건 획기적인 발상 같은데요. 미국 진출은 어떻게?

 이가자 한국에서의 프랜차이즈 사업이 안정기를 맞아 평탄하게 운영되고 있던 1997,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동생의 남편이 미국에 교환교수로 발령받아 그곳으로 가게 됐지요. 평소 사업적인 감각이 출중했던 동생이 미국에 가맹점을 내고 사업을 시작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해외 1호점을 열게 됐습니다. 첫 해외 진출인 LA점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고 현재는 미국에만 14개 가맹점을 두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20년간의 미국 활동의 노고를 인정받아 LA 명예시민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완근 중국 진출에도 애를 많이 쓰신 걸로 아는데.

이가자 미국에 이어 2002년에는 중국 시장에 도전했습니다. 한국의 서비스와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를 내세워 북경호텔에 오픈한 1호점은 입소문을 타고 조금씩 유명해지기 시작했지만 중국에서의 사업은 고비가 많았습니다. 그때는 저뿐만 아니라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체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업을 정리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었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언어가 통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법적인 문제들까지 저에게 깊은 고민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러 문제로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저에게 큰 기회가 찾아옵니다. 한국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와 유사한 중국 전통의 홍루몽 선발대회에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참가자들의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을 맡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중국 미용업계와 연예계에 이가자란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중국인들은 미용인으로 쌓아 온 저의 연륜과 경험을 인정하며 미용의 대가 또는 장인으로 불러줬습니다. 중국 진출 15년이 지난 현재는 총 24개의 가맹점을 두고 있으며, 미국에 이어 중국 진출을 통해 K-뷰티를 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에 문화관광부에서 아시아 문화 교류 유공자 표창을 받고, 베이징 올림픽 행사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완근 축하드릴 일이 많았군요. 이가자헤어비스가 글로벌 뷰티 브랜드로 자리 잡기까지는 대표님의 노고가 뒷받침이 되었음을 다시금 인식하게 됩니다. 호주하고도 교류가 있었지요?

이가자 2006년에 호주 시드니에 ‘LKJ 헤어&뷰티 칼리지를 설립하게 됩니다. 이 학교를 만들게 된 계기는 이가자헤어비스의 글로벌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에 뷰티 아카데미를 설립해 중국 미용인들에게 한국 미용의 우수성을 알리며 큰 호응을 얻고 있었고, 더 나아가 이가자 브랜드를 아시아의 중심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서는 영어권에 아카데미를 만드는 것이 필수 과제라 생각했습니다. 필리핀과 기타 영어권 국가에 아카데미 설립을 타진하던 차에 마침 호주의 미용 이민법과 교육법이 개정돼 LKJ 헤어&뷰티 칼리지(2년제 전문대학)를 설립했고, 호주 영주권 취득률 100%를 자랑하는 유명세를 떨치며 한국 미용의 우수성을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했습니다.


이완근 근래에는 아시아에도 진출했지요?

이가자 2016년에는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싱가포르 최대 쇼핑가 오차드 로드의 만다린 갤러리 쇼핑몰 3층에 100평 규모 이가자 뷰티 살롱을 런칭해 한국형 서비스와 한류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향후 동남아시아 매장 확산과 아카데미 설립 등을 목표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완근 50여 년간 미용 일을 해오셨는데 기억에 남을 만한 일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가자 1998년 마이클 잭슨이 내한 공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단순한 팝 가수가 아닌 다양한 감각을 가진 그를 우리 직원들이 직접 만날 기회를 만들고 싶어 방문을 요청했으나 빠듯한 스케줄로 인해 어려울 거 같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에 저는 고심 끝에 우리나라의 전통 악기 아쟁, 태평소, 거문고 등을 직접 준비한 뒤 마이클 잭슨에게 한국을 방문했다면 한국의 전통 악기들을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냐고 전했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아티스트였던 그는 제 예상대로 전통악기에 대단한 흥미와 관심을 보이며 결국 시간을 쪼개 청담본점을 방문했습니다. 눈빛을 반짝이며 마이클 잭슨을 바라보는 직원들을 보니 단순한 팬의 입장이 아닌 전문 직업인으로서 조금 더 큰 꿈을 꾸게 해주고 싶었던 저의 바람도 성공한 거 같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완근 북한을 방문했던 것은 미용인으로서 유일무이할 것 같은데.

이가자 2000년대 초는 북한과 화해 모드가 조성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와 맞물려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요청으로 한복을 하시는 이영희 선생님과 함께 평양에 초청 받아 한복 패션쇼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쇼 외에도 북한의 미용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위원회에 세미나를 제안했고, 마침내 미용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민족 머리 발표회가 진행됐습니다. 서로의 공감대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진지한 표정과 열정 가득한 눈빛은 평생 잊지 못 할 거 같습니다.


이완근 많은 일을 해오셨는데 이가자만의 정신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가자 저는 항상 사람들이 아름다워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그걸 제가 아름답게 만들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게 해 준 일이 바로 미용이기 때문에 저는 그 누구보다 미용을 사랑하고 일하는 내내 당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제 스스로가 제가 하는 일에 당당함을 가져야 고객들 역시 제가 해드린 헤어 스타일로 더 당당하게 다른 사람 앞에 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객들에게 듣는 칭찬은 언제나 즐겁지만, 가장 행복한 칭찬은 이가자에서 머리를 하면 왠지 일이 잘 풀려요.”라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항상 나 자신과 미용을 당당하게 생각하고, 고객에게 아름다움과 당당함을 찾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이가자 정신입니다.

 

이완근 아직도 젊으신 것 같습니다. 대표님의 꿈은 어디까지인가요?

이가자 도전에 도전을, 열정에 열정을 더하다 보니 어느덧 이가자라는 상호를 사용하여 브랜드를 이끌어 온 지도 4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수많은 브랜드가 태어나고 사라져간 격동의 시간 속에서 미용 브랜드가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온 것은 업계에 실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직 남은 꿈이 있습니다. 국제 미용센터를 한국에 설립해 한국이 아시아 미용의 대표주자가 되는 꿈을 이뤄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이가자헤어비스가 업계 선두주자 그리고 백 년 기업으로 힘차게 나아가기 위한 목표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완근 요즘 미용인들에게 강의도 많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근황을 말씀해주신다면.

이가자 미용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최근에는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고객 개개인의 페이스 라인, 체형, 전체적인 이미지에 맞춰 진행되는 형상설계 커트와 스타일링 방법을 직접 강의하며 노하우를 전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 소상공인협회의 특강 초청으로 전국 곳곳을 다니며, 미용인 대상 글로벌 미용 경영 & 기술에 대한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0여 개 체인매장을 둔 이가자헤어비스CEO가 되기까지, 살롱 경영 비법뿐만 아니라 미용인으로서의 가치관, 신념 등을 나누는 진솔한 시간을 가지며, 미용인과 미용업계의 발전을 위해 여전히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이가자 대표의 강의는 6가지 주제로 집약된다. 1. 미용에 대한 자부심(미용을 하는 우리는 이미 성공했다.) 2. 미용실은 문화교류의 창고다.(미용실은 단순히 헤어만 손질하는 곳이 아니다.)3. 미용은 기술 30%, 서비스70% 4. 매일 공연을 하자. 5.미용은 나이 들어서도 할 수 있다. 6. 즐겁게 성공하자. 이상의 6가지 원칙만 들어도 미용인으로서의 이가자 대표의 자부심과 긍지를 엿볼 수 있다.)


이완근 젊은 미용인 이가자 대표를 만난 것 같아 기자도 즐겁습니다. 현재 우리 미용계가 다들 어렵다고 하는데 한 말씀해주시죠.

이가자 무엇보다 '미용'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하지만, 기술과 감성이 공존하는 미용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고객에게 아름다움과 당당함을 찾아주는 미용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잊지 말고, 항상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해, 고객에게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닌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뷰티 스타일링을 찾아주고, 이를 통해 고객뿐 아니라 디자이너 자신도 본인의 기술에 만족할 수 있는 미용인이 되길 바랍니다.


이가자 대표와의 만남은 많은 교훈을 주었다. 50여 년을 한결같이 사람들을 아름답게 하겠다는 바람으로 미용인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이가자 대표. 75세의 연세에도 그녀의 삶은 처음 미용을 시작할 때의 초심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가자헤어비스, 한국 미용 파이팅이다.

 

[ LEEKAJA COMPANEY HISTORY ]

 

1972 한국 최초 실명 브랜드샵 이가자 미용실설립 및 프렌차이즈 출범

1995 이가자&아카데미 서울 오픈

1997 미국 진출 LA점 오픈

2001 중국 진출 북경호텔점 오픈

이가자&아카데미 중국 오픈

2003 평양 미용 세미나 주최

2004 문화관광부 아시아 문화 교류 유공자 표창 수상

2006 호주 진출 시드니점 오픈

호주 LKJ College (미용 전문 대학) 설립

2007 베이징 올림픽 행사 자문위원 위촉

2009 중국 베이징 중산대학교 이가자 학과 개설

한국 명지전문대학교 이가자헤어비스 계약학과 개강

2010 아시아 디자인 센터 자문위원

한국 국제 뷰티 서비스 협의회 자문위원

2011 한국 KOTRA / 지식경제부 한국 토종 프랜차이즈 선정

2012 한국 최초 브랜드학과 부산여대 이가자헤어비스학과개설

한국 본사 사옥 설립

2013 헤럴드 동아TV 라이프 스타일 어워드 올 해의 헤어 브랜드선정

‘MOTOMOTO’ 클리닉 제품라인 론칭

2014 이가자&아카데미 부산 오픈

이가자 코스메틱스 론칭

2015 이가자 비쥬 아트 론칭

2016 ‘이가자 원장’ LA 명예 시민 수상

동남아시아 진출 싱가폴점 오픈

 

 

<뷰티라이프> 2017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