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나무와 나는-김병호-

불량아들 2018. 5. 28. 13:40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59)


나무와 나는

김병호(1971~ )

 

나무가 멀리로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제 몸에 쟁여놓은 기억이 많아서이다

 

얼룩종다리새의 첫울음이나

해질녘에서야 얇아지는 남실바람의 무늬

온종일 경을 읽는 뒤 도랑의 물소리들

나무는 그것들을 밤새 짓이겨 동그랗게 말아 올린 다음

오돌토돌한 뿌리에 불끈, 힘을 주고선

새벽녘, 달 지고 해 뜨기 전의 막막한 시간을 기다려

온몸으로 털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다시 멀리로 돌아온 그이들이

하루내 팽팽해진 연둣빛 그늘로 몸을 바꿔

부르튼 발목과 젖은 무르팍을 어루만져주기에

나무는,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나무는, 이제

밤마다 제 안을 헐어 바람을 내보내고

젖은 날개의 날것들에게 몸을 내어준다

 

그리하여 나무가 거느린 빽빽한 어둠들이

그대의 기억을 흔들 때

혹은 그이들의 수척한 눈빛이

그대 그늘에 무심히 닿을 때

나무가 이름을 가지에 걸쳐놓고

하냥 먼 곳을 그리듯이

여전히 그대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59번째 시는 김병호 시인의 나무와 나는입니다.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입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집 뒤에 있는 흥천사로 산책을 하는 일은 삶의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예전엔 판잣집 몇 채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흥천사를 증축하면서 이전했는지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남아 옛 정취를 상기시켜 줍니다. 이 느티나무도 멀리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제 몸에 쟁여놓은 기억이 많아서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무와 나는시를 다시 읽어봅니다.

 

나무는 인간사 모든 사실을 목도하고도 막막한 시간을 기다려/ 온몸으로 털어내는지혜를 발휘합니다. ‘새의 첫울음’, ‘남실바람의 무늬’, ‘도랑의 물소리들은 나무를 키우는 힘입니다. 이것은 또한 시인을 키우는 자양분이기도 하겠지요. 또 그 힘은 나무에게 잎을 만들어주고 뿌리를 튼실하게 합니다. 나무는 그래서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무가 있기에 자연은 더 아름다워지고 다양한 소리를 엮어서 우리 삶을 풍족하게 합니다. 내 탓 네 탓 공방이 아닙니다. 모두가 이로움을 상대편의 공으로 돌립니다. 그러기에 밤마다 제 안을 헐어 바람을 내보내고/ 젖은 날개의 날것들에게 몸을 내어주는 것은 나무만이 아니고 하냥 먼 곳을 그리듯이/ 여전히 그대를 기억하는나와 동일시됩니다. 나무와 나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물아일체, ‘나무와 나는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로움이 많은 나무, 자연은 잘 알고 있겠지요?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18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