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57)
비 그친 뒤
이정록(1964~ )
안마당을 두드리고 소나기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 다듬듯 부리를 문지른다
천둥 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이 활개치며 울어 제끼자 울 밑 봉숭아며 물앵두 이파리가 빗방울을 내려놓는다 병아리들이 엄마 아빠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닌다
모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 온몸에 초록 침을 맞은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침 놓은 자리로 엄살엄살 구름 몇이 다가간다 개구리 똥꼬가 알 낳느라고 참 간지러웠겠다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본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57번째 시는 이정록 시인의 ‘비 그친 뒤’입니다.
우리 시에는 비를 소재로 한 것들이 무지 많이 있습니다. 비는 우리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요소가 있나봅니다. 여기 소개하는 이정록 시인의 시는 비 그친 다음의 농촌의 한적한 풍광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역작 중의 역작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좋은 시를 만나면 가슴이 콩콩콩 뛰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시를 읽다보면 그림처럼, 어릴 적 경험했던 시골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나요?
비가 오고 나면 시골 앞마당에 지렁이와 개구리 몇 마리가 나타나는 것은 예삿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지루한 닭의 좋은 먹잇감이었죠. 병아리들은 어땠을까요. 어미 닭이 잡은 먹이를 따라 ‘엄마 아빠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니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경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아일체,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의 영혼이 부럽고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모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거나 ‘온몸에 초록 침을 맞은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개구리 똥꼬가 알 낳느라 참 간지러웠겠다’는 표현에 와서는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보듯 망연자실 감탄도 잊어버리고 맙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시, 주체와 객체가 따로 없는 시, 역동적인 삶의 모습이 긍정적인 시선 그대로 고스란히 녹아 있는 시, ‘엄살엄살’ 다가가 와락 껴안고 싶은 이정록 시인의 ‘비 그친 뒤’였습니다.
‘개구리 한 마리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처럼 우리 생활도 이렇게 역동적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18년 4월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와 나는-김병호- (0) | 2018.05.28 |
---|---|
목련꽃 필 때 너는 뭐 했니-유재복- (0) | 2018.05.04 |
프리미어 리그-박상천- (0) | 2018.02.23 |
어머니를 버리다-정병근- (0) | 2018.01.29 |
기차표 운동화-안현미- (0) | 2018.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