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54)
기차표 운동화
안현미(1972~ )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날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54번째 시는 안현미 시인의 ‘기차표 운동화’입니다.
가난했던 60~70년대는 언제나 배가 고팠고 언제나 서글펐습니다. 배고픔을 달래고자 학교 운동장 한갓진 우물서 물로 배를 채웠고, 코스모스 만개한 신작로를 걸으며 객지에 돈 벌러 나가 있는 누나나 삼촌을 그리워했습니다.
가난은 생활을 궁핍하게 했지만 행복을 빼앗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물놀이하며 고기를 잡고, 겨울밤이면 화롯불에 군구고마 구워먹으며 새까매진 서로의 얼굴을 보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형제자매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집의 어머니는 생활을 책임지려 대처에 나가 있기 일쑤였습니다. 당연히 큰형이나 큰누나, 큰오빠, 큰언니가 가장 노릇을 했지요. 가장은 엄격하거나 자애롭기, 둘 중 하나였습니다.
다행히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가장 노릇을 하는 언니는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군요. 언니는 엄마 이상으로 가족들을 알뜰살뜰 잘 보살폈나봅니다. 집안에서만 뒹굴다 집 밖으로 나서 한편으론 설레고 또 한편으론 두렵기만 한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가’주었던 엄마 같은 언니. 그런 언니기에 ‘시집 가던 날’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것은 당연하겠지요. 어린 동생이 안타까워 언니는 가족이 없으면 허전하기만 할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맙니다. 시집 간 언니도 집안 살림에 시간내기가 녹록치 않았을 겁니다. 대신 동생이 운동회 날 신고 열심히 달리라고 ‘기차표 운동화’를 보내줍니다.
기차표 운동화는 언니의 마음입니다. 동생은 언니의 소중한 마음을 알기에 언니가 보내준 운동화를 신고 ‘먼지를 뒤집어’ 쓸 만큼 달리지만, ‘먼지를 뒤집어쓴’ 운동화는 언니의 부재를 더욱 부각만 시킵니다.
언니가 시집가버려 가꾸지 못한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는 그리움에 목놓아 울고 싶은 시인의 또 다른 분신입니다.
오늘 낮엔 시집간 누나에게 안부 전화라도 해야겠습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2018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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