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기차표 운동화-안현미-

불량아들 2018. 1. 5. 11:45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54)

기차표 운동화

안현미(1972~ )

 

 

원주시민회관서 은행원에게

시집가던 날 언니는

스무 해 정성스레 가꾸던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지요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갔던 언니는

시민회관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 내게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단풍이 흐드러지고 청군 백군 깃발이 휘날려도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

인편에 보내준 기차표 운동화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토닥토닥

집으로 돌아온 가을 운동회날

 

언니 따라 시집가버린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들만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지요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54번째 시는 안현미 시인의 기차표 운동화입니다.

 

가난했던 60~70년대는 언제나 배가 고팠고 언제나 서글펐습니다. 배고픔을 달래고자 학교 운동장 한갓진 우물서 물로 배를 채웠고, 코스모스 만개한 신작로를 걸으며 객지에 돈 벌러 나가 있는 누나나 삼촌을 그리워했습니다.

 

가난은 생활을 궁핍하게 했지만 행복을 빼앗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여름이면 냇가에서 물놀이하며 고기를 잡고, 겨울밤이면 화롯불에 군구고마 구워먹으며 새까매진 서로의 얼굴을 보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형제자매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집의 어머니는 생활을 책임지려 대처에 나가 있기 일쑤였습니다. 당연히 큰형이나 큰누나, 큰오빠, 큰언니가 가장 노릇을 했지요. 가장은 엄격하거나 자애롭기, 둘 중 하나였습니다.

 

다행히 서울로 돈 벌러 간 엄마 대신가장 노릇을 하는 언니는 뒤란 꽃밭의/ 다알리아처럼 눈이 부시게 고왔군요. 언니는 엄마 이상으로 가족들을 알뜰살뜰 잘 보살폈나봅니다. 집안에서만 뒹굴다 집 밖으로 나서 한편으론 설레고 또 한편으론 두렵기만 한 초등학교 입학식 날 함께 가주었던 엄마 같은 언니. 그런 언니기에 시집 가던 날’ ‘창틀에 매달려 눈물을 떨구던것은 당연하겠지요. 어린 동생이 안타까워 언니는 가족이 없으면 허전하기만 할 가을 운동회 날 꼭 오마고 약속했지만’ ‘끝내, 다녀가지 못하고맙니다. 시집 간 언니도 집안 살림에 시간내기가 녹록치 않았을 겁니다. 대신 동생이 운동회 날 신고 열심히 달리라고 기차표 운동화를 보내줍니다.

 

기차표 운동화는 언니의 마음입니다. 동생은 언니의 소중한 마음을 알기에 언니가 보내준 운동화를 신고 먼지를 뒤집어쓸 만큼 달리지만, ‘먼지를 뒤집어쓴운동화는 언니의 부재를 더욱 부각만 시킵니다.

언니가 시집가버려 가꾸지 못한 뒤란 꽃밭엔’ ‘금방 울음을 토할 것 같은/ 고추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는 그리움에 목놓아 울고 싶은 시인의 또 다른 분신입니다.

 

오늘 낮엔 시집간 누나에게 안부 전화라도 해야겠습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2018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