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52)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김재진(1955~ )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드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의 풍경처럼 먼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52번째 시는 김재진 시인의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입니다.
산다는 것은 많은 추억과 회한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봄의 꽃과 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인생이 영글어지고 가을의 끄트머리에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생을 반추하는 것이 삶 아닐까요.
겨우 내의 어둠과 추위를 이기고 또다시 ‘노란 망울 터뜨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맞이하는 우리네의 삶.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인사’는 몇 번 더 보고, 몇 번 더 들어도 좋은 아름다운 생의 징표입니다.
온갖 꽃이 세상을 환하는 물들이기 시작하는 4월 어느 날인가, 김재진 시인께서 정목스님과 함께 운영하는 부암동의 <유나방송>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유나방송>은 마음공부 전문방송입니다. 마음의 치유를 통해 세상에 평화를 일구자는 뜻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말 그대로 꽃의 천국, 마음의 안식처였습니다.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고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때 김재진 시인이 들려주었던 하모니카 소리가 지금도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추억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나 나이 먹으며 살다보면, 정신이 궁핍해질 때면, 이처럼 아름다웠던 풍광을 얼마나 더 보고 들으며 살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떼만 쓸 수도 없는 법. 그래서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게 우리네 인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낙엽, 바람에 일렁이는 가을입니다. 인생의 깊이만큼 그 쓸쓸함도 더해갑니다.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응석부리고 싶은 가을입니다.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이 있다면 기대어 마냥 조잘조잘하고 싶은 가을입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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