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팔월의 정원-정한용-

불량아들 2019. 9. 18. 12:14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75)

 

팔월의 정원

정한용(1958~ )

꽃이 환하네요, 어머니, 개망초인지 애기망초인지, 뜨거운 여름빛에 새하얗게 부서져요. 저기 산나리인지 땅나리인지, 노랗게 웃는 애들도 있어요, 이게 다 어머니 얼굴이면 좋겠어요.


아범아, 내 생전에 화단 가꾸길 좋아했잖니, 여기는 온 산천에 꽃이 지천이구나, 망초 나리 쑥대 칡꽃도 피었네, 푸른색 붉은색 흰색 보라색으로, 이만하면 혼자 사는 정원이 호사스럽구나.


텅 빈 건 외로운 거니까, 여기 자주 못 오는 거, 탓하시는 거, 다 알아요, 꽃뿐인가요, 닥나무 뿌리도 슬며시 어머니 산소 밑동까지 닿았는걸요, 죄송해요, 올 추석에도 동생은 못 올 거라 하던데.


어디 사는 일이 녹록하겠니, 며느리 손자 다 잘 있겠지만, 그리고 아범아, 생전에 부르던 대로 엄마라고 해봐라, 오늘은 여기 무덤가에 우리 둘뿐이구나, 둘만으로도 꽉 찼구나.


망초 몇 점 남겨둘까요, 밭둑을 넘어와 토실하게 맺힌 호박도, 그냥 둘게요, 엉겅퀴는 자색 꽃이 예뻐서, 엄마 좋아하시지만, 뽑아내야겠어요, 남이 보면 벌초도 안 했다 흉볼 거 같아요.


벌써 해가 기울였네, 늦기 전에 그만 돌아가렴, 아범아, 난 여기서 시간 많고 심심하니, 밤새 내가 다 뽑으마, 나리와 산수국 두 줄은 세워둘게, 난 무성한 게 좋은데 아범 욕먹을라.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75번째 시는 정한용 시인의 팔월의 정원입니다.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똑같다는 생각을 이 시를 읽으며 또 합니다. 시인의 어머님이 귀천하셨다면 필자의 어머니는 생존해 계시다는 것만 빼고 말입니다. 시인의 어머님처럼 우리 어머니도 화단 가꾸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어느 겨울날에는 다 죽어가는 선인장을 애지중지 살려놓으시고, 그 선인장이 꽃을 피우자 마치 어린아이가 된 냥 행복해하시던 광경이 문득 떠오릅니다.

 

폭염 주의보가 내린 어느 날,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논일을 나가 저녁까지 들어오시지 않았다는 대답입니다. 저녁 늦게 다시 전화해 연결됐습니다. “논일 나가셨다면서요. 더운 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제발 몸 관리 잘 하세요.” 짜증 섞인 아들내미의 지청구에도 태연하십니다. “야야 내 걱정은 말고 너나 밥 잘 챙겨 먹어라. 논에 풀 투성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흉본다잉.”

 

꽃을 좋아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남에게 퍼주기 좋아하셨던 어머니지만 이웃들의 눈치를 살펴 생활하는 것이 도리라고 믿었던 우리네 어머니!

 

어머니와 아들의 일문일답으로 이루어진 시행에서 독자들은 정다움을 넘어 어머니의 무한한 정과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물씬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셔도 아들 사랑, 자식 걱정에 편히 누워 계실 수 없습니다. 무덤가 꽃들은 이런 어머니의 현신에 다름 아니겠지요.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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