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86)
알밤 한 알
전인식(1964~ )
화두話頭 하나 품으면
한 세상이 잠깐이지
높고 외로운 가지 끝 움막 하나 짓고
무릇 잡것들 범접하지 못하게
촘촘히 가시울타리로 둘러친 다음
한 올 바람도 들지 못하게 문 닫아걸고
눈 감고 앉으면
오로지 한 생각에
바람이 불었는지 비가 왔는지
하안거夏安居도 끝나갈 때쯤
톡
톡
깨달음이 터지는 소리
감았다 뜨는 눈에
비로소 들어 안기는 삼라만상
환한 세상
여쭤볼 틈도 없이
산비탈 숲 속으로 홀연히
입적入寂하고 마는
알밤 한 알
좋겠다
숲 속 다람쥐는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86번째 시는 전인식 시인의 “알밤 한 알”입니다.
지루한 장마 끝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간 이 무더위도 자취를 감추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곤 무더위를 이긴 자들의 향연이 펼쳐지겠지요.
팔월의 햇볕을 이긴 벼들은 황금빛 자태를 자랑할 것이며 감자와 고구마는 토실토실한 알맹이로 그 위용을 드러낼 것이 뻔합니다. 고추잠자리는 하늘 끝에 닿으려 용을 쓰며 엉덩이를 더 빨갛게 달구겠지요. 여름을 이긴 코스모스는 신작로 양 쪽에서 하늘하늘한 잎과 꽃으로 가을의 청명함을 더 부각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도 그 기상이 “높고 외로운 가지 끝 움막 하나 짓고” “하안거”까지 끝낸 밤 한 톨만 할까요. 밤 한 톨은 “화두 하나 품”고 “잡것들 범접하지 못하게/ 촘촘히 가시울타리로 둘러친 다음/ 한 올 바람도 들지 못하게 문 닫아 걸고”, “오로지 한 생각에” 잠깁니다. 그 명상이 추상같습니다. 범접하지 못할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에서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밤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뻐하거나 자만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가르치려 들지도 않습니다. 가을바람에 홀연히 자기 몸을 맡길 뿐입니다. 누구도 범접 못할 추상같은 정신력으로 깨달음을 얻고 그가 향하는 곳은 “산비탈 숲 속”입니다. 거기에서 다람쥐의 한 끼 식량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나저나 “환한 세상” 이치까지 깨달은 밤을 주워 먹은 다람쥐는 부처님 시중이나 잘 들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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