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2)
은하미장원
신은숙(1970~ )
눈 내린 사북 거리
미용사는 일찍이 은하로 떠났는지
흰 슬레이트 검은 페인트 간판 하나
허공을 붙잡고 있다
사북 거리는 온통 간판만 운행 중이다
시몬이발소도 시몬이 떠난 지 오래다
빠마 고데 신부화장
벗겨진 선팅지 너머
꼬불거리고 빛나는 머릿결 쓸어 올린
눈 같은 신부가 앉아 있다
푸른 눈두덩 새빨간 입술
안개꽃 드레스 입고 웃고 있다
신부는 아직 사북에 남았을까
탄가루 날리는 봄
멀리 우는 함백역
기적 따라 떠났을까
미용실도 헤어숍도 아닌 미장원
가위 소리 사라졌어도
검고 흰 기억들만 교차하는
사북 거리
나도 한때 푸른 은하였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2번째 시는 신은숙 시인의 “은하미장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그 대상은 다르겠지만 지난 온 추억, 그 중에서도 어릴 적 보았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잊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추억을 반추하며 회상에 잠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 내린 사북 거리”는 화려했던 옛 시절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허공을 붙잡고 있”는 것은 “흰 슬레이트와 검은 페인트 간판 하나”입니다. 광부들이 북적거리고 그 가족들이 손에 손잡고 불야성을 이루었던 옛 영화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화려(?)했던 시절 “안개꽃 드레스 입고 웃고 있”던 풍경은 사라졌지만 우리 마음속에서까지 잊혀지진 않았습니다. “미용사”도 “시몬”도 “떠난 지 오래”됐지만 우리가 꿈꾸었던 것은 “한때 푸른 은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향은 세월 따라 쇠락해가지만 내 마음속 고향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할 뇌리 속,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으니까요.
시대적 변화가 우리를 심리적 공황에 빠지게 할 때도 있지만,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세계로까지는 인도하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을 이기는 것은 아직 없으니까요.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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