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호박잎쌈-이건행-

불량아들 2021. 4. 16. 12:48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94)

 

호박잎쌈

이건행(1965~ )

 

술 취하면

부여사람이라고

울먹이며 말했던 아버지

 

까닭을 몰랐으나

생전에 즐겨 드신

호박잎쌈 먹으니

알 것 같네

 

호박잎에 눌어붙어

하늘거린

아버지 세상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94번째 시는 이건행 시인의 호박잎쌈입니다.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자 극복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보리밥에 물을 말아 고추장에 고추를 잔뜩 찍어 맛있게 드셨던 장면은 시골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생각나는 추억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아버지 입속에서 나는 고추 씹는 소리는 세상 어느 소리보다 청아하고 맑았습니다. 호박잎이 연한 색을 띄기 시작할 때 살짝 데쳐서 된장에 얹어먹는 밥맛은 아무나 느낄 수 있는 맛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런 맛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대처에 나와 계신 아버지들께서는 대개 약주를 좋아하셨습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도시에 눌어붙어살면서 약주를 드신 날이면 고향 얘기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어린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마다 드시는 술은 물론이고 물 말아 드시는 밥과 호박잎쌈을 즐겨 드시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자 맛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께서 즐겨 드시던 술과 음식의 맛을 알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의 마음은 시나브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음식은 서로의 관계를 인식하는 최대의 공약물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아버지를 이해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자식들 곁을 떠나계십니다.

 

그러곤 자식들에게 어느 날 문득 호박잎쌈속에 깃드셔서 아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어놓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넘어, 아버지처럼 누구에게도 신세지지 않고 베풀며 세상을 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합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자식들에게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1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