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참깨를 털면서-김준태-

불량아들 2015. 4. 2. 11:32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2)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1948~ )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都市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온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2번째 시는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초, 중, 고를 가차이 살아온 필자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서는

서울내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골 생활에 대해 놀라기도 했고 반대로 서울내기들의

정서에 쉽게 동화하지 못하는 시골뜨기들의 행동 사이에서 당황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서울깍쟁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시골 생활 얘기는 도시 생활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촌놈들에게 그나마 위안거리가 되었습니다.

 

서울내기들은 시냇가에서 비 맞으며 수영하는 기쁨을 알지 못했고 여름 저녁

무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합창 소리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네들은 밤에 횃불을 들고 개울에 나가 톱으로 고기 잡는 즐거움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겨울 산에 올라 토끼몰이 하는 시골내기들의 정서를 이해 못하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봄에는 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따먹기도 했고 삐비가 돋아나면 껌으로 대신했지요.

찔레의 새순을 꺾어 손톱에 발랐으며 방과 후에는 골목길 마다마다에서

딱지치기, 팽이 돌리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지금도 시골 생활을 생각하면 가슴이 마구 뜁니다.

비 오는 날, 온 가족이 툇마루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부쳐 먹는

부침개 맛은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은 모릅니다.

필자가 부모님께 가장 고마워하는 점이 시골에서 태어나게 했고 시골에서 자라게 했다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시골내기들만이 느끼는 아련한 추억과 경험은 그 무엇보다도 값지고 아름답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참깨를 텁니다.

아마도 참깨 밭은 산그늘 밑에 있을 것입니다.

참깨는 알이 익어갈 무렵 낫으로 베어서 묶음으로 세워 놓았다가

햇볕에 잘 마르면 비닐 멍석을 깔고 막대기로 탈탈 텁니다.

이때 참깨가 비닐 멍석에 쏟아지며 내는 소리는 참깨 향보다 더 우리 마음을, 귀를 즐겁게 합니다.

 

할머니께서는 참깨를 털면서도 멍석 밖으로 굴러나간 참깨 한 알도 용케 아시고 주워 담으십니다.

산마루에 석양이 들기 시작하면 마음이 급해진 손자는 참깨 단을 마구 내리치기 시작합니다.

가을 햇살 살살 달래듯이 참깨 단을 내리쳐야 참깨 알이 솔솔 나오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모가지가 부러지면 일이 더 복잡해지는 줄도 모르는 손자입니다.

할머니의 꾸지람은 그냥 나무람이 아닙니다.

세상사 순리와 순서가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참깨 하나를 털면서도 세상사는 이치를 가르치시는 우리 할머니십니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붑니다.

이 기운이 올 가을 농촌에까지 이어져 시골에서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것입니다.

할머니의 잔소리와 함께.....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201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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