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3)
능소화
오인태(1962~ )
누가 발목을 저리도
모질게 붙들고 있을까
내 사랑은 끝내 담을 넘어
내게 오지 못했다.
여름내 안간힘으로
목만 늘이다가
눈 부릅뜬 채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23번째 시는 오인태 시인의 ‘능소화’입니다.
가장 큰 사랑의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하지 못 할 때일 것입니다.
죽도록 보고 싶은데 그 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눈 크게 뜨고 목을 길게 늘어뜨려 보지만 밤이 다가도록, 날이 새도록, 계절이 변하도록,
아아, 님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사랑이여, 사랑의 슬픔이여....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어 궁궐 내에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모든 사내가 한번 보면 그 자태에 홀딱 빠졌지만
그녀는 어느 사내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소화의 소문은 임금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왕도 소화를 보자 연정을 이기지 못하고 잠자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의 잠자리 후 어찌된 영문인지 왕은 소화를 다시 찾지 않습니다.
소화는 임금님과의 하룻밤을 잊지 못합니다.
담 너머 왕의 모습을 안타깝게 그리워하지만 모습조차 볼 수 없습니다.
상사병에 걸린 소화는 결국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맙니다.
눈을 감으면서 소화는 왕이 계신 처소 울타리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죽어서도 울타리 넘어 님을 보겠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상은 능소화에 대한 전설입니다.
시인이 이 전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설보다 더한 연민의 그리움을 이 시는 절절하게 담고 있습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찬연하게 빛을 발하는 능소화를 보며
시인은 이루어지지 않는 안타까운 사랑에 대해 생각합니다.
사랑의 완성은 합일이라고 남들은 말하지만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순백의 그리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두 눈 부릅뜬 채 생명을 소진하는 아름다움이 사랑의 완성이라면 너무 슬픈가요?
능소화가 서슬 퍼런 여름 햇볕 아래에서도 광채를 발하며 담을 넘고자 애쓰는 이유는
담 넘어 저쪽에 그 사랑이 존재하고 있음을 시인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능소화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물아일체, 시인의 사랑은 지금 능소화 붉은 꽃 속에 처연하게 처연하게 피어나고 있네요.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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