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불황기의 사랑-백인덕-

불량아들 2015. 3. 3. 15:36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1)

 

불황기(不況期)의 사랑

백인덕(1964~ )

 

 

 

그는 그녀를 집으로 끌고 다녔다.

--울산집, 아줌마집, 과부집......

그는 그녀를 방으로 끌고 다녔다.

--설다방, 금강다방, 차다방......

그는 그녀를 논으로 끌고 다녔다.

--존재론, 예술론, 우주론......

그녀가 집이 싫증났다고 하자 그녀를

너무 사랑하는 그는

그녀를 성으로 데려갔다.

--만리장성, 자금성, 소주성......

그녀가 방이 싫증났다고 하자 그녀를

너무 사랑하는 그는

그녀를 장으로 데려갔다.

--오락장, 당구장, 경마장......

그녀가 논이 싫증났다고 하자 그녀를

너무 사랑하는 그는

그녀를 담으로 데려갔다.

--농담, 속담, 야담, 만담......

 

물가가 안정되고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선

이듬해 봄,

그는 취직을 했고, 그녀는 결혼했다.

그들은 사랑했고 서럽게 이별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1번째 시는 백인덕 시인의 불황기의 사랑입니다.

 

진지(?)한 시를 쓰는 백인덕 시인에게 이처럼 가벼운 시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시인의 모습을 포장하지 않고 담아낸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아니 문학은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고

재미를 선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필자는 이 시가 마음에 듭니다.

더구나 백인덕 시인과는 한때 술을 같이 마시며 놀았고, 그의 기행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백인덕 시인의 모습은 20대의 이상(李箱)과 겹치고

막걸리 마시고 침을 튀겨가며 삿대질하는 천상병 시인에 다름 아닙니다.

술 취해 얼큰하면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를 멋들어지게 읊었습니다.

더 취하면 우리나라 원로 시인들조차도 시 못 쓰는 조무래기들이 되었고,

그는 이미 노벨문학상을 탄 거성이 돼 있었습니다.

그의 궤변은 끝이 없이 이어졌지만 결코 밉지 않았습니다.

그의 고운 심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황기의 사랑은 시인이 오래 전에 썼던 시일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시에서 그의 행적이 고스란히 보여집니다.

그녀를 끌고 다녔던 아줌마집, 금강다방, 예술론, 소주성, 당구장, 야담 등은

이미 우리가 경험했던 장소이며 담론입니다.

시인은 스스로 그의 생은 불황기였다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랑을 끌어들여 한 편의 서러운 시를 완성합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의 생에서 불황기는 끝났습니다.

과거에 놓쳤던 로또를 시인은 다시 찾았습니다.

엄마 같은, 누이 같은, 동무 같은 평생의 동반자를 몇 년 전에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인의 인생은 흑자로 돌아섰고 아름답게 살아갈 날만이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그녀를 과부집, 설다방, 존재론, 자금성, 오락장, 농담 속으로 알맞게 끌어들여

벗겨진 앞머리가 적당히 반짝반짝 빛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 M> 2015년 3월호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능소화-오인태-  (0) 2015.04.28
참깨를 털면서-김준태-  (0) 2015.04.02
사라진 입들-이영옥-  (0) 2015.02.02
환장하겠다-이봉환-  (0) 2015.01.08
시골길-이재무-  (0) 2014.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