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숙다방 기행-김경래-

불량아들 2015. 6. 26. 10:03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5)

  

숙다방 기행

김경래(1962~ )

  

그 사람일까

그 사랑일까

문이 열리면

먼 곳을 돌아온 그대

어깨에 내린 봄볕을 털며

쌍화차를 시킨다

   

이제야 은발이 된 머리카락

도회의 골짜기 어디쯤서

밤을 샌 술 냄새는

등진 창 역광에 빛바랜 한철

  

먼 바다를 떠돌던

해풍의 배를 탔을까

가슴 깃 비린 갯내음

창가 라일락 필 때쯤

잦은 파도가 일고

  

찻잔을 든

저리도 파리한 손으로는

누구에게 젊은 날

아린 편지를 썼을까

사랑한다고 혹은

사랑한다고

  

어쩌다

봄볕 아픈 쪽 문이 열리면

또 스쳐만 가는 한없는 봄날

그대 기다리는 날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5번째 시는 김경래 시인의 숙다방 기행입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누가 말했던가요?

특히 나이가 들수록 아련한 추억, 더 나아가 아름다웠던 사랑이라도 반추할라치면

흐릿한 눈도 반짝반짝 빛나게 되는 삶의 이치.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 추억을 차곡차곡 쟁이며 살아야 하는 법인가!

   

이 시의 화자는 어느 한적한 산골에서 찻집을 운영하고 있나 봅니다.

은발이 희끗희끗한 연세쯤 되었겠네요. 손님도 없는 따사로운 봄날

-꽃잎이 한가롭게 너울거리고 벌들은 꽃을 찾아 붕붕거리는 소리를 내는-

창 밖 경치를 감상하며 옛사랑을 추억하고 있을 때 어깨에 내린 봄볕을 털며한 사내가 들어옵니다.

밤을 샌 술 냄새가슴 깃 비린 갯내음을 한꺼번에 안고서 말입니다.

  

그 사내는 그녀의 옛 애인에 다름 아닙니다.

가슴이 쿵쾅거리겠지요. 은발의 나이에도 뛰는 심장이 있다는 것,

그래도 그 마음을 억눌러야 한다는 것, 시인은 지그시 이 광경을 지켜볼 뿐입니다.

  

젊은 시절 연필심에 침 묻혀가며 '사랑한다고/ 혹은 사랑한다고썼을

그 사내의 파리한 손을 덥석 잡아보고 싶은 스쳐만 가는 한없는 봄날의 상념.

그대 기다리는오늘 같은 날은, 순전히 봄바람 탓이겠지요, 순전히 봄날 탓이겠지요?

  

토방 쪽마루에서 봄볕을 쬐며 졸고 있던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는 김경래 시인의 숙다방 기행입니다.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201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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