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추석 무렵-김남주-

불량아들 2015. 8. 25. 13:46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7)

 

 

추석 무렵

-김남주(1946~1994)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7번째 시는 김남주 시인의 추석 무렵입니다.

 

이번 달에는 추석이 들어 있군요.

시기와 나이에 따라 추석을 느끼는 마음도 각기 다를 법합니다.

필자가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추석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었으며 배곯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는 신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신발 공장에 다니던 고모가 운동화를 사오는 날이었으며,

객지의 삼촌이 <어깨동무>, <새소년>과 함께 24색깔이나 들어있는 색연필을

선물로 가져오기도 했던 날입니다.

 

추석은 우리 모두의 명절이었지만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아이들에게는 더 큰 기쁨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른들에게도 추석은 분주하게 다가왔지요.

객지에서 떠돌던 빚쟁이 이웃들도 추석만큼은 고향에 내려와서 지냈지요.

서로 등 두드려주며 격려하고 위로해주었지요.

 

때는 추석 무렵, 어린 자식 하나를 데불고 고향을 찾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 골짜기를 거닐며 추억에 잠깁니다.

초승달이 앞길을 비추며 길을 인도합니다.

저 달은 소싯적에도 있었지요.

 

시인은 옛 생각에 젖어 기막힌 장면(?)을 놓칠 뻔합니다.

다행히 네 살짜리 아들내미가 엉덩이로 쉬하는 아낙들을 용케 발견했네요.

망측도 하여라, 달빛 아래 허연 엉덩이라니.....

그러나 하나도 망측하지 않습니다.

살아있음의 또 다른 싱싱한 장면입니다.

이는 태평양 앞바다 고래의 힘찬 전진입니다.

아프리카 들소들의 우렁찬 돌진입니다.

고추밭의 고추들이 분기탱천하여 빠알갛게 일어설지라도

아낙들의 잘못은 결코 아닙니다.

그녀들의 수줍은 미소조차 초승달이 대신해줍니다.

미소를 넘어 입이 째지도록 웃고 또 웃습니다.

 

추석 무렵, 우리 시골의 밤은 이렇게 푸근하게 넉넉하게 깊어져갑니다.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 M> 201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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