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어떤 품앗이-박성우-

불량아들 2015. 10. 14. 14:48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8)

 

어떤 품앗이

-박성우(1971~ )

 

구복리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을 자줬다

 

구 년 뒤, 한천양반이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청동댁이 한천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을 자줬다

 

다시 십일 년 뒤, 청동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한천댁이 청동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을 자줬다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들 했다

 

자식새끼들 후다닥 왔다 후다닥 가는 명절 뒤 밤에도

이 별스런 품앗이는 소쩍새 울음처럼 이어지곤 하는데,

 

구복리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 수열이 어매고

한천댁은 울 어매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28번째 시는 박성우 시인의 어떤 품앗이입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고들 합니다만 내면의 깊이에서는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연, 학연, 혈연을 넘어서야 한다고 외쳐봅니다만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건 역시 이 세 가지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연과 혈연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연으로 엮여 있지요. 물론 세상이 변하여 혈연까지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시대가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하더라도 아직까지 견고한 것이 시골 인심입니다.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사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십여 년 이상을 살아가는 도시인의 눈으론 이해 못하겠지만요. 스승의 날에 삶은 옥수수와 감자를 보자기에 싸서 얼굴에 홍조 띄우며 선생님께 내미는 것이 아직은 우리 시골 인심입니다. 큰일이 났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는 이들도 다름 아닌 이웃들이었습니다.

 

필자가 어렸을 적,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이면 아버지는 우산도 없이 하교하는 이웃 마을 초등학생들을 업으시고 집에까지 바래다 주셨습니다. 특히 밤늦게 하교하는 고 학년생들은 밤이 되면 으레 우리 집에 들러 아버지 보호 아래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꼬마의 눈으로도 그런 아버지가 여간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넋이 나간 사람 곁에는 사람의 체온만이 위로를 줍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함께 자는' 것만큼 큰 위로는 없겠지요.

 

십여 년 이상을 가족같이 사귀었던 사회의 어떤 친구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하루 아침에 변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골 이웃들은 때론 대수롭지 않은 일에 삐치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마음 따뜻이 손을 내밀어 하나가 되지요.

 

이런 품앗이, 언제든지 함께 하고 싶지 않으세요?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 201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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