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석양-강혜지-

불량아들 2016. 1. 4. 10:22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31)

 

석양

-강혜지(1973~ )

 

 

하늘이 뜸을 들인다

펄펄 끓었던 태양을 내리고

풍경소리 매달린

처마 밑까지 붉게

붉게 물들이며 숙성시킨다

 

땅 위에 머리 눌 곳을 찾는

생명들의 낡은 기억에서

그리움으로 남는

오래 묵은 장맛과도 같은

발효된 향과 빛깔

 

수줍음으로 타오르던 뺨

저리도록 꽃물 들었던 손가락

헤어짐으로 붉혔던 눈시울

노을을 향해 짖어대던 개

아이를 부르던 누군가의

소리

 

울타리 허물면 번지던

밥 익는 소리

오늘도 하루가

뜸 드는 저녁

!

그 때 그 무렵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31번째 시는 강혜지 시인의 석양입니다.

 

언젠가 붉게 물든 서녘의 태양을 보며 저 해는 왜 저렇게 빠알갛게 빛나고 있을까?’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태양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온 마을, 온 거리거리, 온 빌딩 사이를 헤집어보며 많은 것을 목도했을 것입니다. ‘풍경으로 매달린 처마 밑이나 수줍음으로 타오르던 뺨’, ‘노을을 향해 짖어대던 개도 보았겠군요. 그러나 태양은 이런 아름다운 장면만을 보았을 리가 없습니다. 경찰에 쫓기는 소매치기도 보았을 터이고, 엎드려 구걸하는 나이 어린 소녀도 보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손, 발을 휘저으며 싸움질하는 패거리들도 보았겠지요. 그래서 하루를 마칠 때쯤 태양은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잊고 내일은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해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은 붉어질 수밖에 없다고 필자는 생각해왔습니다.

 

강혜지 시인은 다르군요. 석양이 오래 묵은 장맛과도 같은/ 발효된 향과 빛깔을 내는 것은 헤어짐으로 붉혔던 눈시울’, ‘밥 익는 소리’,  ‘뜸 드는 저녁때문이라는군요. 그 시절의 향수가 너무 강해서 지금 석양을 보며 시인은 !/ 그 때 그 무렵을 간절하게 다시 한 번 외치는군요. 강혜지 시인의 고향은 어릴 적 하염없이 뛰어놀 골목길이 있던, 가을이면 감 익어가는 고샅길이 있는 시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기억 속의 풍경은 또 하나의 풍경을 잉태합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간직한 삶을 산 사람이 성공한 삶을 산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M> 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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