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아배 생각-안상학-

불량아들 2016. 4. 8. 12:58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34)

 

아배 생각

-안상학(1962~ )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오늘 외박하냐?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야야, 어디 가노?

-……. 바람 좀 쐬려고요.

-,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34번째 시는 안상학 시인의 아배 생각입니다.

 

우리나라 특히, 시골의 아버지들은 어쩜 그렇게 똑같으신지요? 무뚝뚝하시고 무표정하시다가도 한마디씩 하는 말씀들이 그렇게 차원 높은 위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활에서 우러나온 풍자와 해학은 요새 개그맨들은 따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을 향한 한마디 한마디는 촌철살인에 다름 아니지요.

 

고등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필자는 어느 설날 전전날, 시골 친구들을 우리 집 사랑방에 불러 모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객지에 취업해 있던 시골 친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명절 때는 모두 고향에 내려왔기 때문에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혈기왕성한 소년, 소녀들은 잠시 일탈을 감행했습니다. 소주에 막걸리는 물론 양주며 담배를 사랑방에서 마셔대고 피워댔습니다. 이십 여 명이 넘는 청춘들이 방방 뛰며 난리가 났습니다.

 

다음날 아침 사랑방에서 눈을 뜬 필자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새로 놓은 구들장은 풀썩 주저앉아 있었고, 콩나물 시루안의 콩나물은 담배꽁초 때문에 검게 썩어 처참한 몰골로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토로 발라진 벽에는 젓가락 몇 개가 꽂혀 있기도 했습니다.

 

친구 몇 명과 아버지께 사죄하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풀 죽은 우리들을 보며 아버지께서 한 말씀하셨습니다. “이놈들아, 양주가 있었으면 적어도 한 잔은 남겨놨어야지.”

 

그런 아버지께서도 오래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니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이완근(시인, 월간 뷰티라이프 편집국장)

  <미용회보 M> 2016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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