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

멍-박형준-

불량아들 2018. 8. 27. 10:49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62)



박형준(1966~ )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장사 떠나셨던 어머니

함지박에 고춧가루를 이고

여름에 떠났던 어머니는 가을이 되어 돌아오셨다

월남치마에서 파도소리가 서걱거렸다

우리는 옴팍집에서 기와집으로 이사를 갔다

해당화 한 그루가 마당 한쪽에 자리잡은 건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섬으로 떠나고 해당화 꽃은 가을까지

꽃이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빨간 멍을 간직했다

나는 공동우물가에서 저녁 해가 지고

한참을 떠 있는 장관 속에서 서성거렸다

어머니는 고춧가루를 다 팔고 빈 함지박에

달무리 지는 밤길을 이고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이제 팔순이 되셨다

어느 날 새벽에 소녀처럼 들떠서 전화를 하셨다

사흘이 지나 활짝 핀 해당화 옆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 사진이 도착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심장이 고춧가루처럼 타버려

소닷가루 아홉 말을 잡수신 어머니

목을 뚝뚝 부러뜨리며 지는 그런 삶을 몰랐다

밑뿌리부터 환하게 핀 해당화 꽃으로

언제나 지고 나서도 빨간 멍 자국을 간직했다

어머니는 기다림을 내게 물려주셨다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62번째 시는 박형준 시인의 입니다.

 

시골내기들의 유년 추억은 유난히 어머니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삶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분이 부모님이고 그 중에서도 어머니가 끼친 영향은 지대할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이치겠지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맛있는 것은 드실 줄 모르고, 멋진 옷을 입을 입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밥 짓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논, 밭일 심지어는 시인의 어머니처럼 철따라 행상을 나가는 것도 다반사였지요. 모두 가족을 굶지 않고 먹여 살리고자 하는 염원 한 가지였습니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장사 떠나셨던 어머니이기에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신 건 당연지사. 동백이란 꽃은 어떤 꽃이던가요. 겨울을 이기고 가열차게 꽃을 피웠다가 그 정열을 이기지 못하고 목을 뚝뚝 부러뜨리며 지는꽃입니다. 화끈한 삶을 살다가는 꽃입니다. 그에 반하여 해당화는 봄부터 여름까지 꽃을 피웠다가 한여름의 열기 속에서 꽃이 말라비틀어진 자리에 빨간 멍을 간직하는 꽃입니다. ‘심장이 고춧가루처럼 타버려/ 소닷가루 아홉 말을 잡수신 어머니처럼 지고 나서도 빨간 멍 자국을 간직하는 꽃입니다.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는 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한 번도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고 시인은 또 강조합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화끈한 삶보다는 밑뿌리부터 환하게 핀 해당화 꽃처럼 사시다가 결국은 가족을 위해 할 일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마음에 멍 자국을 남기시고 떠나시는 존재입니다.

 

그런 어머님이 아들에게 남기신 건 기다림이란 산 교훈이었습니다. ‘활짝 핀 해당화 옆에서/ 웃고 있는 어머니 사진이그리운 계절입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1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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